햇볕정책의 저변에 깔려있는 형식논리는 일견 매력적이다. 요컨대 남북한 체제경쟁은 끝났고 객관적으로 남한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것, 승자는 온유하게 패자를 덮어주어야 하고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 결국 패자는 승자에게 동화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햇볕정책의 대의를 이어갈 것이라는 진단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 정치는 가치의 수호자로서의 '선명보수'를 내세운 새로운 야당을 탄생시키고 있다. 한나라당조차 이 대목에서 이명박 노선을 주류로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듯 보인다. 실제 4월의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보수이념의 대표자'로서의 지분을 놓고 이명박 박근혜 이회창씨가 선명성 경쟁을 벌이거나 이합집산할 가능성까지 보이고 있다.
◇햇볕정책 계승 의구심 고조
국민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노선갈등으로 여당이 안팎으로 흔들리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유능하고 실천하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압도적 국민적 지지와 함께 이념적 소용돌이를 피해 나가려면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선례를 참고할 만하다.
대공황을 극복하려던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당시 자유주의 이념의 산실 미국 대법원의 판결로 번번이 위기에 처했다. 다만 당장의 현실문제가 급했던 미국 국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그의 정책을 뒷받침했다. 당시 사회주의자로 의심 받았던 루즈벨트는 "내게 이념이 있다고? 있다면 기독교와 민주주의"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동포 고통에 침묵 안된다
현실 문제로서 북한을 다뤄나가야 할 이명박 당선인 역시 자신을 지탱해 줄 굳건한 이념을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반면 대북포용의 관점에 철저했던 햇볕정책은 서해교전에서 희생된 군인들 앞에서, 우리의 건국과 국가정통성을 자랑하고 기념해야 할 자리에서, 6·25전쟁의 비극을 환기시키고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인권을 회복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시점에서,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권에 대해 호소하고 북한동포들의 위급하고 당면한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할 자리에서 대체로 비겁하거나 소심했다.
교육현장에서는 한국의 지도자들에게는 잔인한 비판을,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너그럽도록 가르치는 일이 일어났고, 기업들은 정부 눈치를 보느라고 북한인권문제나 탈북자 지원을 외면했다. 지도자가 극심한 체제경쟁기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쟁'을 너무 걱정했으며 우리 국민을 소심하게 만들어 버렸다.
북한의 체제변화를 걱정한 나머지 바야흐로 북한이 우상체제를 약화시켜 주민들의 의식을 합리화시키고 자립심을 키우도록 유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을 냉전의 그늘에 버려두었다. 생존을 위해 북한땅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하고, 유리걸식하며 제3국을 떠돌고 있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돌아보았을 때 수치를 당하지 않을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데, 햇볕정책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많은 약점을 보이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 산업화 민주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햇볕철학' 과감히 일소해야
결국 국가의 자존심과 국격(國格)의 관점에서 심각하게 오도되었던 햇볕정책을 이념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새 정부는 건국, 6·25전쟁, 산업화, 북한인권에 대한 관점에서 건강성을 회복해야 하며, 이러한 상황은 각종 법률과 정책을 통해서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햇볕정책의 철학을 과감하게 일소하지 않으면, 또 한번 국민들은 알 수 없는 허무감으로 바른 말과 바른 정책을 해줄 정치가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자칫 예상되는 '보수의 난'에 정국(政局)이 휘말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새 정부가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김미영 한동대 교수
출처: 2008년 1월 25일(금) 국민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