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은 대선패배를 두고 지려고 해도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당선인 주변에 처해진 상황을 보면 처량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명박 정부 출범때보다 훨씬 혹독한 시험대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박 당선인이 앞으로 잘하려 해도 잘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 같다고도 했다.
물론 역대 정권때마다 대내외적인 도전이 있었다. 먼저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으로 북한보다 더 가난한 나라로 출발하였다.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가 북한을 앞지르는 경제력을 이루게 되기까지 차기 정부로 넘어간 채 햐야 했다.
이후 포사출신 집안의 윤보선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갔으나 파벌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위도 끊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탄 군부에서는 쿠테타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 윤 대통령은 잔여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하야 했다. 아울러 당시의 실권인 총리인 장면에 있었을 정도로 허수아비 정권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대통령 당선인의 선친으로 한국사에 한 획을 그은 대통령으로 기억된 박정희 대통령도 초기에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우리나라의 형편이었다. 살인적인 실업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유세현장에 몰렸으나 이에 환호하는 야당후보와 달리 박 후보자는 걱정에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박정희 후보는 당시 유권자들을 일컬어 "이 사람들 모두 실업자들일텐데!"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북한에 뒤쳐져있었고 당선 1년 후 가치가 될 물건을 파는 운동을 전개하고 광부와 간호사를 같은 분단국인 서독으로 파견했다. 그러한 정성으로 초기에 두자릿수(80불)이던 국민소득이 임기 마지막 해에는 네 자릿수(1200불)을 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군조직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도 선임 대통령이 이룬 성장의 기반을 다지고 국정을 이끌어 갔지만 세계적인 석유파동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했고 신군부로 일컬어지는 군조직의 쿠테타와 잇다른 시위로 정정불안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16년 만에 직선제로 선출한 대통령이자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이니셜을 가지고 출범했다. 그렇게 민주화의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상태였고 대내외적으로는 공산국가들의 붕괴와 중국이 개혁, 석유가하락등 국제정세에도 변화가 생기자 외교를 굳건히 다지도록 했다.
민주투사 김영삼 정부는 비교적 시험대 없는 순조로이 정권이양을 했다. 서태지와 이이들, 현진영, 노이즈, 듀스와 같은 힙합전사들이 대거 양성되어 한류의 기반을 마련했고 인구가 정점으로 산아정책이 완전히 폐지된 시기였다. 그러나 공산권국가들의 붕괴와 석유가 하락으로 글로벌 경기가 호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아닌 갱제로 발음하다 IMF라는 희대의 경제난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이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50년만에 정권교체라는 혁명을 달성하였으나 환란 와중에서 제2의 건국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시작되었다. 국민소득 1만불을 달성한지 1년만에 초래한 외환위기로 2년도 안되어 5천불대로 내려앉았고 총 생산량도 40%가 감소했다. 이때부터 구석기시대에도 없었던 저출산고령화가 시작되고 동성애와 낙태가 증가했다.
그러던 김대중 정부 말기에는 다시 1만불을 회복하였고 경제력도 세계 11위로 한자릿 수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시점에서 출범한 NO무현정부였지만 느딧없이 북핵사태가 발생하면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더구나 정부를 제외하고 지방자치와 의회가 모두 야당이 석권했기에 여대야소 정국을 맞이했다. 급기야 의회를 통해 탄핵위기에 처하게 되고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을 하는 위치에 놓이기도 했다.그나마 월드적인 불황에도 선방한 중국덕택에 친중정책에 올인하던 노무현 정부때 주가가 2000선을 돌파할 수 있었고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개막했다. 또한 우군인 좌파진영의 반대에도 한미FTA를 치진하여 야당측에서도 지지를 받는 현 정부가 검토한 중도실용의 완성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다음 선수인 이명박 대통령은 정권탈환의 성공으로 우파진영에서 우려한 적화통일의 가능성을 잠재웠지만 경제대통령으로써 대내외적인 경제상황이 도전이 되었다. 석유가는 베럴당 세자릿 수를 돌파했고 이로 인해 식료품 물가가 줄줄이 인상되었다. 이후에도 이상기후로 하여금 물가상승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지20 의장국으로 소속국가들과의 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2050클럽이라 하여 지구촌 금융위기로 1만불 대로 하락한 국민소득이 임기 중반되던 해 2만불을 회복하였고 쌍춘년과 흑룡띠에 기인하여 어느정도 출산율이 증가하면서 임기 마지막 해에 우리나라 인구는 5천 만명을 넘어섰다.
2013년 우리나라에서는 1천년만에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대내외 정세는 그 어느 정권때보다 녹록치 않다. 그러므로 부친의 못다 이룬 뜻을 그 2세가 이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