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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북한민주화위원회 주최로 ´북한인권법 4월국회 통과를 위한 탈북 단체 삭발식 및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의원님들께서도 오셔서 격려연설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왜 양해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마이크(스피커) 소리를 줄입니까?”
“삭발도 못 한다 그래서 하지 않고 마무리만 하면 된다지 않습니까. 의원들도 허락했는데, 가니까 이러는 겁니까?”(탈북자단체 관계자)
“소리가 커서, 의원님들 의정활동 하시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국회 사무처 경위)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 계단. 탈북자단체들의 북한인권법 통과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의원들이 잡을 때는 ‘우렁차던’
마이크 소리가 의원들이 돌아간 뒤 갑자기 줄어들었다. 탈북자단체 대표들이 돌아가며 “북한 주민들도 한번 ‘인간답게’ 살게 해주자는 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것을 나 몰라라 해서야 되겠느냐”고 규탄연설을 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마이크 소리가 줄어들자 단체 대표들은 ‘생목소리’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기계에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던 탈북자단체 관계자의 눈에 국회 사무처 소속 경위가 슬그머니 스키퍼 볼륨
스위치를 작게 줄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미 단체 관계자들이 규탄연설을 하는 틈을 타 한번 소리를 줄였다가 눈치를 못 채자 재차 소리를 줄이려 하다가 눈에 뜨인 것이다.
국회 경위 측은 ‘삭발식은 일종의 시위로, 국회 100m 안에서는 시위를 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 이들을 제지하고 이발도구와 의자 등을 압수했다. 삭발식이 무산되고, 이어서 경위 측이 북한인권법 통과를 약속한 국회의원들이 돌아가자 마이크 소리마저 줄이면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
탈북자단체 관계자들은 “국회 안에서 삭발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이발도구를 가져간 것도 이해했다. 마무리 짓고 가겠다고 한 것에 동의한 거 같더니, 이렇게 훼방을 놓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국회 경위들은 묵묵부답. “소리를 줄이는 건 좋다. 양해라도 구했어야 하지 않나” “의원들도 양해한
행사고, 의원들이 있을 땐 괜찮더니 가고 나니 이러는 거냐” 탈북자단체 대표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자 국회 경위 측에서는 “의원님들 의정활동 하시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줄였다”고 답했다.
‘소리를 원상복귀 해놓으라’는 탈북자단체들과 ‘여기서 소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는 국회 경위 측은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국회 경위 측 책임자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리 원래대로 키워놔.”
6년째 잠자고 있는 북한인권법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국회를 찾은 탈북자단체 관계자들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들이 국회에 모여 있으니...” 한 단체 관계자가 장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이날 북한민주화위원회를 비롯한 27개 탈북자단체들은 북한인권법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삭발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안찬일 세계북한인총연맹 총재, 김승철 북한개혁방송 대표, 한일성 숭의동지회
회장 등 탈북자단체장 5명은 삭발에 동참하기로 했었다.
탈북자단체들의 삭발식은 북한인권법 통과에 대한 결의를 보여주는 상징적 퍼포먼스. 생업에 종사하는 탈북자들 수십명이 동참했다. 북한에 있는 가족, 친지들이 당할 불이익을 염려해 노출을 꺼리던 탈북자들이 이날만은 맨얼굴로 섰다.
“차라리 김정일에게 허락을 받는 게 빠르겠다” “북한인권법을 외면하는 의원들에 대해 낙선운동을 하자” “정치적 이익을 챙기느라 인권은 이념을 넘어 지켜져야 한다는 양심과 영혼을 판 거냐” 등 단체 대표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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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북한민주화위원회 주최로 ´북한인권법 4월국회 통과를 위한 탈북 단체 삭발식 및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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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북한민주화위원회 주최로 열린 ´북한인권법 4월국회 통과를 위한 탈북 단체 삭발식 및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탈북자단체들의 분위기가 이처럼 격앙된 데에는 ‘참을 만큼 참았다’는 서운함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북한인권법은 대북민간단체 지원 확대와 북한인권재단,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에 대한 의지를 밝혀왔으나, 민주당 등 야당이 ‘남북관계를 경색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의 ‘의지’에 탈북자단체들은 이번 4월 국회가 열리기 이전까지는 ‘그래도 믿어보겠다’는 입장이었다. 지난해 연말 한나라당이 직권상정으로 예산안 처리와 법안 통과를 강행했을 때 북한인권법은 민생법안도 아닐뿐더러 여야 간 이견이 크다는 이유에서 제외됐다. 당시 한나라당은 “다음에는 꼭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으나, 올해 2월 임시국회에서도 북한인권법은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탈북자단체들은 올해를 북한인권법 통과의 ‘마지노선’으로 보고 있다. 북한인권법이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간 지 1년이 지나도록 계류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4월
회기 내에는 상임위를 통과해 늦어도 연말까지는 본회의에 상정돼야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장은 민주당 소속의 우윤근 의원. 민주당이 북한인권법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다음 회기에서도 북한인권법을 놓고 여야가 대립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김일성 탄생 100주년을 맞는 2012년은 북한이 ‘강성대국 완성의 해’로 공표한 시점. 북한은 이때를 기점으로 김정은으로의 후계체제를 완전히 착륙시키고, 3대 세습독재를 안정화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이 겹치기 때문에 북한인권법은 각종 공약이나 정권 막바지의 각종 정책에 밀려날 수 있다는 점을 탈북자단체들은 우려하고 있다.
특히 북한인권법을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진보좌파 단체와 야당의 공세가 지속되면 지난 17대 국회 때와 같이 18대 국회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자동 폐기되는 사태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게 단체들의 지적이다.
이로 인해 ‘4월 회기에 법사위 통과라도 시켜보자’며 탈북자단체들은 각 당에 협조를 요청해왔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과 면담을 갖고 공개서한을 보내 법안 통과를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민주당이나 의지만 피력하는 한나라당이나 법안 통과의 기조차 보이지 않자, 탈북자단체들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여야가 서로 책임 떠넘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다수결로 통과시킬 기회를 달라”는 이들의 목소리는 “북한인권법 통과를 저지하는 정당과 의원들을 상대로 사실상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수위를 높인 상태다.
탈북자단체들은 북한민주화위원회를 중심으로 ‘공동행동’을 지속할 방침이다. 국회 앞에서 진행 중인
릴레이 단식투쟁도 4월 말까지 계속하고, 각 정당에 촉구서한도 다시 보내기로 했다. 특히 법사위 소속 의원 가운데 북한인권법에 반대하는 의원의 지역구를 찾아가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날 삭발식은 무산됐지만 곧 있을 북한자유주간에서 다시 삭발식을 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인권법에 찬성하는 보수우파 성향의
시민사회단체 등과 연대하는 한편, 거리 서명운동을 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북한 인권 관련 단체들도 탈북자단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에 동참하는 분위기. ‘북한인권법제정을 위한 국민운동본부’는 이미 “4.27 재보궐 선거에서 북한인권법을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를 호소하는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경기 성남 분당을과 경남 김해을, 전남 순천을 돌며 북한인권사진전을 개최해 공론화에 나설 예정이다. 민주노동당 후보가 야권연대 단일 후보로 결정된 순천에서는 북한 인권 관련
컨퍼런스도 열릴 계획이다.
보수우파 성향의 지식인,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도 지난 달 ‘북한인권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시민사회·지식인선언’을 결성하고 북한인권법 통과를 압박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북한인권법 공론화를 위해 사회 각계의 서명운동 등을 준비 중이다. [데일리안 = 변윤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