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知性을 위한 북한 강의
김미영
한동대학교 글로벌에디슨아카데미 교수
약력: 서울대 국문과 및 대학원(MA)/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JD) /전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이사 및 기관지편집장/전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기자/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현) / 한동대 교수 |
Topic:
1. 기독교인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2. 독일과 북한, 조지 케넌과 6자회담
3. 세계 제 2차 대전과 새로운 적
4. 뉘른베르크 재판과 동경재판
5. 6.25와 한미동맹
6. 마오쩌둥, 스탈린, 김일성
7. 김정일의 존재
8. 북한: 1994-2008
9.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
<참고자료>
1. 북한 우상화 현실
2. 북한묵상을 위한 성경적 기초
참고자료 <북한의 우상화 현실>
자료출처 www.nkchosun.com
유일사상 10대 원칙 [2001-02-04] |
주민들의 행동-삶 일상적으로 규율
북한 주민들의 사고와 행동, 삶을 일상적으로 규율하는 최고의 규범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이다.
북한에도 헌법과 법률이 있고, 그보다 상위 규범인 노동당 규약이 있지만 주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규율하는 것은 이 10대원칙이다. 때문에 북한 사회에 진정한 변화가 일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주요 잣대도 이 원칙에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를 지켜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원고지 50쪽 분량의 이 10대원칙을 완전히 통달해야 할 뿐 아니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지켜야 한다.
10대원칙의 제3조 6항에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초상화, 석고상, 동상, 초상휘장(배지), 수령님의 초상화를 모신 출판물, 수령님을 형상한 미술작품, 수령님의 현지교시판, 당의 기본구호들을 정중히 모시고 다루며 철저히 보위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신문에 실린 김일성의 사진 한 장도 잘못 다루면 정치범 취급을 받게 된다.
북한의 공식 문건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잡지·출판물 등에 기고한 글에서도 반드시 김일성(김정일) '교시'를 인용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역시 10대원칙의 조문에 근거한 것이다. 10대원칙 제4조 7항은 "보고, 토론, 강연을 하거나 출판물에 실린 글을 쓸 때에 언제나 수령님의 교시를 정중히 인용하고 그에 기초하여 내용을 전개하며 그와 어긋나게 말하거나 글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10대원칙의 제5조 1항은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법으로, 지상의 명령으로 여기고…"라고 규정하여 김일성(김정일)의 말(교시)이 곧 법이자 어길 수 없는 지상 명령임을 밝히고 있다. 10대원칙은 또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을 기본 척도로 하여 간부들을 평가하고 선발 배치하여야 한다(제9조7항)고 명기하고 있다.
현재의 10대원칙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지명(1974.2)된 이후 그가 주창한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주체사상화)" 과업 추진과 함께 발표(1974.4.14)됐다./김광인기자 kki@chosun.com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요약)
1.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여야 한다. 2.김일성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3.김일성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4.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 하여야 한다. 5.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6.김일성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결을 강화하여야 한다. 7.김일성동지를 따라배워 공산주의풍모와 혁명적 사업방법을 소유하여야 한다. 8.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9.김일성동지의 유일적 령도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률을 세워야 한다. 10.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김광인 kki@chosun.com |
우상화: 개요(가계도) |
북한의 우상화는 김일성 주석 개인우상화에서 점차 가계우상화를 강화하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식량난과 함께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김일성의 유훈통치를 표방한 1997년 이후에는 이른바 '3대장군-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우상화가 본격화됨으로써 가계우상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1997년 1년동안 북한의 총 건설실적은 82건으로 이중 현지지도 표지비, 말씀판 등 정치선전물 건립이 62건(75.6%)인데 비해 경제부문의 건설실적은 20건(24.4%)에 불과했다(통일원 발표). 정치선전물은 주로 김정일 현지지도 표지비, 김일성 현지교시 및 김정일 김정숙 현지말씀판, 김부자 혁명사적 표지비 등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총비서로 추대된 1997년 10월 한달동안 11개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김 국방위원장의 1인체제가 굳어지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의 생모인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숙에 대해서 '불멸의 백두여장군', '혁명의 어머니, 탁월한 정치활동가', '위대한 혁명가이자 공산주의 혁명투사' 등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김정숙모범 따라배우기 운동'이 진행된다.
김정숙 관련 기록영화 '어머님의 총소리 영원하리라'가 제작되었고 사진을 담은 우표와 우편엽서가 발행되고 있다. 그의 출생지 함북 회령시에는 김정숙혁명사적관이 있다.
그밖에 1996년 각 군의 소대단위 내무반에 이들 3인의 초상화를 한 장으로 인쇄한 120x40 cm 크기의 '3대 위인상' 부착되기 시작했고, 이을설 호위사령관은 '3대장군 잊지 못하네'라는 가요를 만들기도 했다. 1997년 12월에는 '김일성 현지교시-김정일 말씀-김정숙 말씀판이 조선중앙적십자병원에 내걸렸다.
행정구역과 학교 등의 이름을 가계우상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김정숙의 이름을 딴 행정구역과 학교가 가장 많다. 1981년 8월 양강도 신파군·읍을 김정숙군·읍으로 신파여자고등학교와 혜산제2사범대학을 김정숙여자고등중학교, 김정숙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1988년에는 함북 경성요양소와 평양에 탁아소를 건설, 김정숙요양소와 김정숙탁아소로 각각 명명됐으며, 평남 평성시에는 김정숙제1고등중학교가 있다.
1975년에 평양 제1사범대학을 김일성의 부친 이름을 따 김형직사범대학으로, 1988년 8월에는 양강도 후창군·읍을 각각 김형직군·읍으로 바꿨다. 1990년대 들어 김일성 숙부인 김형권의 이름을 빌려 양강도 풍산군·읍을 각각 김형권군·읍으로, 풍산군 파발고등중학교를 김형권고등중학교로 개명했다.
김일성의 이름을 딴 북한 최고의 김일성종합대학이 있고, 김 국방위원장의 이름이 붙은 정일봉고등중학교가 1992년 개교했다. 이 학교는 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밀영에 있는 학생수 120명의 미니학교다.
김일성의 아우 김철주의 이름을 딴 김철주사범대학,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이름이 들어간 강반석유자녀대학과 강반석고등중학교가 있으며, 1994년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에 강반석탁아소가 건립되었다.
1994년 8월에는 김일성의 조부 김보현의 이름도 교명으로 등장했다. 농업간부재교육대학의 김보현대학이라고 개칭한 것이다. 북한의 중앙인민위원회는 정령을 통해 김보현을 "일제 침략자들과 지주들을 반대하여 굴함없이 싸우면서 자손들을 조국광복을 위한 혁명투쟁에 내세우고 적극 도운 열렬한 애국자"라고 소개했다.
김보현은 1871년 8월 19일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오늘의 평양시 만경대구역)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평생 농사를 짓고 살다 1955년 9월 2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한 전형적인 촌로였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 가계우상화작업에 따라 김일성 증조부 김응우와 함께 "봉건관료배와 외래침략을 반대하는 정신이 투철한 열렬한 애국자"로 추앙됐다.
김정숙의 동생 김기송도 우상화의 대상에 포함됐다. 1995년 8월 그의 동상이 새로 건립되었다. 그동안 김기송은 북한에서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는데 김일성 사후 김정숙 우상화 분위기에 편승해 부각되기 시작했다.
앞서 북한은 1995년 1월 중앙인민위 정령을 통해 회령고등중학교를 '김기송고등중학교'로 개칭하면서 그를 '김정숙과 함께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영웅적 위훈을 세운 소년혁명가' '항일아동단원들의 전형'으로 찬양했다.
심화되고 있는 가계우상화는 처음에는 역사 왜곡에서 시작되었다. 북한은 우리 근세사를 김일성 가계(家系) 중심으로 변조하고 있다. 1860년대에는 침략군사기지, 상품시장기지 획득을 위해 미국이 침입해 왔다고 주장하면서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해 왔을 때는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중심이 돼 셔먼호를 격침시켰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해서 전민족이 일어섰던 3·1운동도 마치 김일성의 어버지 김형직이 주도해서 일으킨 것처럼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즉 3·1운동은 "김형직 선생이 평양에서 애국청년들과 함께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며 "인민대중이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 하는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함으로써 3·1운동을 가계우상화에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즉 북한은 민족대표 33인을 부르주아계급으로 매도하고 민족대표들이 외세에 의존했기 때문에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일성의 어버지 김형직의 주도로 평양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곱의 어린이에 지나지 않은 김일성이 3·1운동에 참가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1997년 3월에는 김형직이 조직 지도했다는 '조선국민회' 결성 80주년을 맞아 중앙연구토론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여 그를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다.
▶ 김정일 가계도
※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공식 부인)은 본명이 이영숙이며, 국내에서는 '김영숙'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김정숙(金正淑, 1917~1949) 김성애(金聖愛, 1924~)
성혜림(成蕙琳, 1937~) 김정남(金正男·남, 1971~) 이영숙(李英淑, 1947~) 김설송(金雪松·여, 1974~) 고영희(高英嬉, 1950~) 김정철(金正哲·남, 1981~) 김정운(金正雲, 남) 김일순(여)
김경희(金敬姬, 1946~) 장성택(張成澤, 1946~) 장금송(張琴松·여, 1977~) 장수길(張秀吉, 1990~)
김광섭(金光燮, 1952~) 김경진(金敬珍, 1952~) 김충민(金忠民·남, 1981~) 김동민(金東民·남, 1983~)
김평일(金平一, 1954~) 김순금(金順琴, 1956~) 김은송(金恩松·여, 1981~) 김인강(金仁剛·남, 1983~)
김영일(金英一, 1955~2000) 염춘월(1965~) 김성강(金成剛·남, 1983~) 김명강(金明剛·남, 1987~) 김형강(金炯剛·남, 1990~)
※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 ※ 장금송은 2006년 8월 프랑스에서 사망 |
우상화: 김일성 우상화 |
김일성 주석에 대한 개인숭배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그에 반대하는 주요 세력들을 제거(8월종파사건)하고 1인독재체제의 기반을 구축한 1958년 이후부터로 볼 수 있다. 김일성 개인숭배운동은 과장된 찬양과 상징조작, 과거행적의 비화와 선전, 사상교육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김일성을 호칭할 때에는 그 이름 앞에 최상의 수식어, 최상의 경어가 붙는다. 예컨대, '어버이 수령'에서 '김일성 그이는 한울님'에 이르기까지 그를 호칭하는 수식어는 매우 다양하다. 1960년대 그에 대한 우상화 초기에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경칭과 찬양의 수사가 무려 180여자에 달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의 이름에 새로운 수식어나 경어를 붙여가며 인간의 위치에서 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
우리 민족의 근대사, 항일독립운동사는 김일성의 날조된 혁명투쟁사로, 그 일가의 족벌사로 개작되었다. 북한의 신문, 잡지와 각급 학교 교과서, 학술서적 등 모든 출판물들은 반드시 김일성 교시로부터 시작하여 내용이 서술되며, 출판물의 대부분은 김일성의 과장된 행적들을 수록한 개인숭배를 위한 선전책자에 불과하다. 북한의 헌법, 노동법, 토지법, 교육테제 등 모든 법령 등은 김일성의 저작물로 되어 있다.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는 항일혁명투사, 조선의 해방자로서 김일성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노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서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라는 빨치산 동료들의 회고록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은 북한 주민들에게 정치학습의 기본교재로서 성전처럼 되어 있다.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는 박성철, 김동규, 최현, 임춘추 등 항일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는 94명이 각각 집필한 것을 한데 모았다는 책자. 총 12권(3222쪽)으로 되어 있으며 1959년 5월 '조선로동당 력사연구소'에서 발간하였다.
이 회상기에는 김일성이 '축지법을 쓰는 전설적 영웅'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책자의 허구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는 김일성 빨치산부대가 15년간 10만여 회의 전투를 통해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김일성이 하루 평균 20여 회의 전투를 한 셈이 된다. 또한 북한의 선전물들은 어느 어부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이 책을 읽었더니 삽시간에 파도가 조용해졌다는 기적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일성은 맑스, 레닌을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천재적 이론가로 칭송된다. 모든 주민들이 먹고 입고 쓰고 일하는 것이 모두 '수령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토록 강요하고 있다.
각 가정의 안방에는 반드시 그의 사진을 걸고 신주 모시듯 해야 하고 전국 각지에는 3만5000개가 넘는 동상과 석고상을 세워놓고 전 주민이 참배토록 하고 있다.
김일성 개인숭배운동은 그의 가계와 혈통에 대한 우상화로 확대되어 직계 선조, 외가친척, 전처의 행적을 과장 날조하여 역사책에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활동하였다는 장소는 혁명유적지·사적지로 지정되고 있으며, 그리고 혁명열사릉에다 그들의 무덤까지 꾸며놓은 실정이다.
북한은 1992년 4월 13일 김일성에게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최고의 대원수칭호를 수여함으로써 그에 대한 우상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김일성 우상화작업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지속되었다. 김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시신을 금수산기념궁전(당중앙위원회·당중앙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 명의로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칭(1995.6.12)하였다.)에 안치하고 주민들로 하여금 참배토록 하고 있는 등 김일성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대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김일성을 '영원한 수령'(사로청 결성 50주년 즈음 호소문(1995.10.27). 이 호소문은 김 국방위원장을 '오늘의 위대한 수령'으로 묘사하고 있다)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미지를 화석화시키는 작업을 벌였다.
최근 북한은 김일성 영생론을 주장하고 영원한 수령으로 부르면서 김일성의 이미지를 화석화시키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1998년 9월 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는 김일성을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로 추켜세우면서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고 사회주의 헌법을 김일성헌법으로 명명하였다. |
우상화: 김정일 우상화 |
북한은 김정일에로의 권력승계를 준비하는 과정과 병행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김정일 우상화 작업을 벌여 왔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그에 대한 호칭 변화이다.
북한은 1974년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그에 대해 '당중앙'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오다 1975년 6월 김정일의 생일을 휴무일로 공식 지정하면서부터 '유일한 지도자'라는 호칭을 등장시켰다.
1975년 10월부터는 김일성 주석 생전 그의 1977년 이후에는'당중앙'이라는 호칭과 함께 '영명하신 지도자, 존경하는 지도자,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이 등장하였으나 김정일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또한 '당중앙의 불빛을 우러러' 등의 가요를 보급함으로써 주민들에게 '당중앙'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지도록 하였다.
김 국방위원장에 대한 호칭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등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그 이전과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즉 1983년 2월 김 국방위원장의 41회 생일을 계기로 '영도자'란 호칭이 등장하였고 1983년 5월에는 그의 군부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목적으로 직책과는 상관없이 '최고사령관'이라고 불렀다.
1985년 2월에는 '수령'호칭이 일시 나타난 바 있으며 1986년 2월에는 '인민의 어버이' 그리고 이른바 구호문헌 발굴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인 1987년 2월부터는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영도자, 백두광명성, 향도성 등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김일성과 거의 같은 형태와 수준의 호칭을 그에게 사용함으로써 그가 북한 권력의 최고 수위임을 나타내었다. 1991년 10월에는 '또 한분의 걸출한 수령' 호칭이 나타났다.
1993년 7월에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노동신문에 기고한 기명논설에서 김 국방위원장을 '탁월한 군사전략가, 강철의 영장'으로 불렀고, 1993년 8월에는 '민족의 어버이, 인민의 지도자'라는 호칭도 등장하였다. 1993년 10월에는 김정일을 '우리 아버지'라고 지칭한 2곡의 가요를 제작하여 주로 청년학생들을 대상으로 보급하였다.
북한은 각급 학교 교과서에도 김 국방위원장을 우상화하는 내용을 수록하고, 그와 관련한 교과목을 정규과목으로 편성하여 청소년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인민학교 국어교과서에는 "나는 아버지 원수님에 대한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의 뜨거운 충성심을 깊이 느꼈습니다"(인민학교 1학년 국어 '참배', p.31)라는 구절이 있으며, 고등중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아, 친애하는 우리의 지도자 김정일 동지, 그이께서 백두산에 탄생하시였다"(고등중학교 3학년 국어 '해돋이')라는 찬양이 등장한다.
각급 학교 수학과 대수에서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선생님의 크나큰 사랑이 깃들어 있는 '은덕분교'로 인민학교 학생 165명이 견학을 갑니다. 그 가운데 3/5은 4학년생이고…"(인민학교 4학년 수학 '분수', p.160.)등으로 김정일과 관련지어 문제를 내는 방식이 쓰이고 있고, 음악 교과서에도 "온 나라 꽃봉오리 학습터 찾아 지도자 선생님을 따라 배워요"(인민학교 1학년 음악 제31과 '장자산의 학습터', p.71.)등 김정일을 찬양하는 가사가 등장한다.
북한은 또한 김정일의 '위대성'과 '빛나는 업적'을 찬양하는 책자와 문학작품 그리고 노래를 대량으로 제작해 주민들에게 보급하고, 김정일의 출생 및 성장과 관계가 있는 여러 지역을 '혁명사적지'로 조성하여 왔다. 1982년 '어은혁명사적지'를 시작으로 현재 16개가 조성되어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가 출생하였다는 백두산밀영으로, 북한은 여기에 귀틀집, 회의장소 등을 건립하여 놓고 이를 '백두산밀영 고향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한의 문예출판사는 1991년 9월 김정일에 관한 전설을 모은 '백두광명성 전설집'을 발간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여기에는 김정일이 해방 후 청진시를 방문, 일본인들이 쓰던 지구의의 일본지도를 먹으로 새까맣게 칠해놓자 일본 땅에 검은 구름과 소낙비가 내렸다는 내용의 '지동이 울다'를 비롯하여 30여 편의 김정일 전설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북한은 1987년 5월부터 항일혁명투쟁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나무 껍질을 벗겨 글을 써 넣었다는 소위 '구호나무'(구호문헌)에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그 태양빛 이어갈 백두광명성", "아, 조선아 백두성 탄생을 알린다" 등의 구호가 발견되었고, '탄생' 및 '후계자로서의 위상'과 관련한 200여 가지의 김정일 칭송 문헌이 발견되었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1988년 2월 김정일의 46회 생일을 기해 일본의 한 화원 주인이 오랜 연구 끝에 재배에 성공하여 기증하였다는 베고니아과의 꽃을 '김정일화'로 명명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보급·선전하였다. 또한 백두산, 금강산 등 명산의 바위 위에는 한 글자의 길이가 수미터나 되고 글자의 깊이만 해도 1m에 이르는 김 국방위원장의 어록과 이름을 새겨 자연을 크게 훼손하면서까지 우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김정일 우상화에는 김일성 자신도 직접 참여하였다. 1992년 2월 16일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의 아들을 찬양하는 친필 김정일송시를 한문과 한글로 발표하였으며, 1994년 3월과 4월에는 "김정일 조직비서는 한마디로 말하여 충성의 최고 화신입니다"라고 칭찬한 것을 비롯하여 "신념이 강하고 배짱이 센 사람, 소박하고 검소한 사람,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등으로 공개적으로 찬양한 바 있다.
또한 북한은 김일성 사망 이후 맞이한 김정일의 53회 생일에 즈음하여 1995년 2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1992.2.7 김일성 비준)으로 김정일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지정하고 주민들에게 이틀간의 휴무일을 부여하는 등 공식적인 권력승계를 앞두고 후계자로서의 상징조작을 강화하였다.
한편 북한은 1993년 1월 28일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김정일의 통치방식을 '인덕정치'와 '광폭정치'로 규정한 이래 계속해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김정일 우상화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북한은 '인덕정치'의 실현을 통해 "영도자와 인민들이 사랑을 베푸는 어버이와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자식간의 혈연적 관계가 형성되었다."(노동신문, 1995.1.15 참조)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의 호칭도 '친애하는 지도자'에서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로 바뀌었다. 김정일정권이 공식 출범한 이후에는 '최고사령관 동지', '장군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이 일반적으로 쓰인다(통일부, '2000 북한개요').
북한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이러한 호칭의 종류가 1200가지라고 공개하면서 선군영도에 대한 호칭 120가지, 태양에 관한 호칭이 50가지가 있으며 그외에 품성, 자질, 신화적 호칭도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조선중앙방송, 2003.11.21).
<자료출처: 통일부, 북한동향:2003.11.21~11.27> |
신성한 의식 장소 '혁명력사연구실' [2001-08-28] |
◇ 유치원 높은반의 연구모임 장면. 유치원 혁명역사연구실은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경대 김일성 생가 등을 세트로 제작해 교육하므로 일반 연구실의 내부 모습과는 다르다.
북한 전역의 마을과 학교, 공장, 기업소, 군대 등에는 빠짐없이 "김일성혁명력사연구실"이 마련돼 있다. 주민들은 줄여 ‘연구실’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공부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신성한 의식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연구실에는 맨발로는 들어갈 수 없다. 흰 양말을 신고 단정하게 들어가야 하지만, 정 없는 경우에는 색깔있는 양말이라도 신어야만 한다. 교시내용을 받아적는 "연구록"도 필수품이다. 양말과 연구록이 없어 못 들어가는 경우 학생들은 청소 등의 벌을 받고, 일반인들도 조직생활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런 "연구모임"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지휘에 따라 각급 조직에서 주도한다. 가령 인민학교에서는 반장 대신 정치적으로 학급을 대표하는 소년단의 분단위원장이 담임선생님과 함께 연구모임을 지도하는 식이다. 가정주부들도 여맹조직에 속해 있으므로 제외될 수 없다. 연구실에 들어가서는 "김일성동지의 고매한 덕성과 인민적 사업작풍, 혁명전통을 체현하는" 학습을 받는다. 1~2시간 지속되는 연구모임은 엄숙하지만 지루하므로 짓궂은 이들은 책상 곳곳에 낙서를 남기기도 한다.
연구실 "관리자"는 조직생활에 충실하고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여성이 주로 뽑힌다. 조직의 신뢰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긍지는 높지만,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한다. 산천초목도 떨게 하는 "유일사상10대원칙"에 의거 "김일성동지의 초상화, 석고상, 동상, 초상휘장, 수령님의 초상화를 모신 출판물, 수령님을 형상한 미술작품, 수령님의 현지교시판, 당의 기본구호들을 정중히 모시고 다루며 철저히 보위"(3조6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 밤이면 행여 연구실내의 석고상이 떨어지거나 금이라도 갈까봐 발을 동동 구르며 달려가기 일쑤다.
커튼을 달고 융단을 까는 것은 연구실이 속한 관할 조직원들의 몫이다. 건물과 필수적으로 비치되는 물품을 뺀 장식품은 주민들이 사재를 털어 장만하는 것이다.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대신 돈을 가진 북송 재일교포들이 화려하고 값비싼 커튼이나 융단, 꽃 등을 희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충성심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주민들의 삶의 공간에서 가장 깨끗하고 정갈하며 고급스러운 곳은 바로 이 연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주민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던 90년대 연간에도 이런 연구모임은 지속됐다. 작년 초 평양을 다녀온 한 조선족 학자는 "배고픔 속에서도 학습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전한다. 오히려 이런 모임은 더 강화되는 측면이 있다. 99년에는 전국 학교에서 일제히 "김정숙(김정일의 어머니) 어머님 혁명활동연구실"도 개관했다. /김미영기자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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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문헌: 개요 |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구호문헌'이란, 일제 당시 항일운동을 하던 투사, 지사, 열사들이 독립의 염원을 구호의 형태로 나무에 새겨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호문헌은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 하기 위한 선전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힌다.
구호문헌이 세인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1960년대 초 일부 구호목들이 발견되면서부터다. 백두산 청봉지역에서 19그루 가량의 구호목들이 최초로 발견된 이후 1987년 김정일 45회생일(2.16)을 기점으로 북한은 새로운 우상화물로서 구호문헌을 널리 선전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항일운동시기에 김일성 주석을 비롯하여 김정일, 그의 생모인 김정숙 등 김일성 일가를 찬양한 구호문헌들이 나무에 다수 새겨졌다가 발견되어 전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공인된 70년대 들어 북한은 김정일과 관련된 구호문헌들이 발굴되었다고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선택된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확고한 후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포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극심한 경제난 속에 핵과 대량살상무기를 둘러싸고 북미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대내외적 정치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북한은 2003년 다시 김위원장을 칭송한 구호문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2003년 2월 14일, "현재 북한내에 김위원장을 칭송한 구호문헌이 200여점에 달하고 있으며, 이는 지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조선 혁명가들이 김정일 동지의 탄생(1942년 2월 16일)을 민족 대경사로 맞이하고 그를 <백두광명성>으로 높이 칭송하면서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아름드리 나무에 새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날 보도에서는 구호문헌들이 백두산 일대와 함경북도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널리 발견된다고 주장하며 구체적인 문헌 글귀들을 소개하였다.
소개된 문헌의 글귀들을 살펴보면 <아 조선아 백두성탄생을 알린다>, <백두산 태양성 솟았다>, <조선의 자랑 백두광명성>, <광명성은 조선의 미래>, <락락장송 같이 건장하라 백두광명성>, <태양빛 이어 빛날 백두 광명성 장수축복>, <백두산에 김일성 장군의 계승인 백두광명성 탄생>, <백두광명성 김대장 후계자> 등 김정일의 탄생을 경축하고 선택받은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뒷받침하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호나무란, 구호문헌이 새겨진 나무를 말하는데, 북한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항일운동시기(1920~30년대) 김일성을 따르던 항일빨치산 대원들이 밀림의 나무껍질을 벗겨 새겨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구호나무를 유리관 등으로 둘러싸 보존하고 있다.
과거 북한이 소개한 백두산 기슭 청봉숙영지의 아름드리 나무에 새겨진 구호에는 <조선청년들 속히 달려나와서 항일전에 힘있게 참가하자>, <일어나라 단결하라 전세계 로력대중들아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싸우자> 등 항일혁명과 계급투쟁을 호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구호문헌에 대해 북한이 가계우상화 선전을 위해 조작했다는 데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현재 북한 전역에서 발견됐다는 구호문헌은 1만2000여 점에 이르며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와 같이 김정일과 관련된 것은 200여 점 가량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일과 관련된 것들은 대부분 그의 '백두산 출생설'을 뒷받침하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김정일이 출생할 때부터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김정일을 '백두광명성'·'백두산태양성'·'독립백두성'·'조선의 광명성'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 구호나무 내용
"아 조선아 백두산에 백두광명성 탄생"(함북 연사군 신북리) "동포들이여 백두산에 독립백두성 솟았다"(함북 연사군 신장리) "아 조선아 백두성탄생을 알린다"(함북 연사군 연사읍) "백두산 태양성 솟았다"(함북 연사군 로평리) "백두산에 김일성대장 계승인 탄생"(함남 영광군 자동리) "백두천상에 조선의 광명성 솟았다"(함북 온성군 하삼봉리) "2천만민의 대통운 백두광명성 출성"(라선시 선봉군 사회리) "백두산에 김일성장군의 계승인 백두광명성 탄생"(평남 안주시 립석리) "겨레여 백두산상에 백두광명성 솟았다"(자강도 랑림군 서중리) "동포여 보느냐 듣느냐 백두산에 김대장 뜻 이을 광명성 솟았다"(평북 대관군 평화 리) "조선아 자랑하라 백두광명성"(함북 새별군 종산리) "조선아 태양성 탄생을 만방에 자랑하라"(함북 연사군 연사읍) "백두산에 솟아난 백두태양성 2천만이여 만방에 자랑하자"(함북 어랑군 룡연리) "동포 모두 백두산 바라보라 광명성 비친다"(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조선 미래의 광휘 백두광명성 만세"(라선시 선봉군 백학리) "은하수빛 흘러간 길을 따라서 어서 빨리 보고싶은 백두성 찾아가자"(라선시 선봉군 백학리)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모시고 백두태성 찾아가는 이길에 영광 빛나라 42년"(라선시 선봉군 백학리 "백두성 5대양 6대주 비칠 붉은 태양으로 키우자"(함남 북청군 죽상리) |
[북녘추억] 썩은 고목에 목숨바친 인민군 [2006-01-19] |
김명석(가명) 전 노동당 간부
수령독재로 유지되는 북한에는 민주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희한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화재현장에서 수령의 초상화부터 구해야 하고, 뒤집힌 배에서 수령의 초상화를 비닐에 싸서 가슴에 품고 죽은 선원은 영웅이 된다. 수령은 동상, 사진, 심지어 고목나무에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북한에서 노동당 산하기관에 근무할 때 있었던 웃지 못할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북한에는 「구호나무」라는 것이 있다. 구호나무는 일제시대 때 김일성이 인솔하는 항일유격대(발치산)가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을 칭송하는 문구(구호)를 나무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호나무는 죽은 나무이거나 고목들이다.
하지만 수령우상화와 김정일의 후계자 구축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살아있는 나무도 구호나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50년 전에 조각하듯 칼로 새긴 글자인데 그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있을까?』 무슨 시약을 동원해서 밝혀냈다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구호나무가 전국적으로 수천 그루가 나오게 된 것이다.
북한당국은 인민들을 총동원해 이 구호나무를 관람시켰는데 그 반응이 아주 묘했다. 나무도 자라면서 세포분열을 하는데 글자는 어떻게 원형 그대로 남아있을까?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구호나무에 사람들은 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구호나무에 새겨졌다는 글자들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에 백두광명성이 솟았다』 (여기서 광명성은 김정일을 뜻한다), 『백두광명성 만만세』 『백의동포여, 조선의 대를 이어줄 백두광명성이 솟았다』, 『3대장군(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만만세』 등등이다.
수백 개의 고목에 새겨진 구호나무는 해외에서 수입한 2만 달러짜리 특수유리관에 영구 보관되고 살아있는 나무들은 보호대를 설치하고 주변을 각종 장식물로 치장했다. 이 구호나무를 훼손하는 것은 수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과 똑같은 중범죄로 간주해 엄벌에 처했다.
1997년 8월경 평북 신의주 지방에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났는데 구호나무들이 대거 물에 휩쓸렸다. 市당국은 물에 휩쓸린 주민들을 구하는 것보다 구호나무를 건져내는데 진력했다. .
그리고 건져낸 구호나무들은 도(道)에서 가장 큰 목욕탕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그곳에서 말리도록 지시를 내렸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밤낮으로 그 목욕탕을 지키며 나무 말리기에 여념이 없던 보일러공들과 노동자들이 밤에 술을 먹고 관리를 게을리 하는 바람에 구호나무에 불이 붙어 모두 타버린 것이다. 즉시 비상소집이 걸렸고 노동자 7명은 족쇄(수갑)를 채워 국가안전보위부에 연행됐다. 물론 김정일에게도 이 사실이 직보됐다.
간부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저마다 목청을 높였지만 김정일은 홍수와 굶주림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이들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며칠 후 평북도당 간부들은 광장에 주민들을 불러내 이 사건과 관련된 행사를 진행했다. 주민들은 다들 이들에게 틀림없이 극형이 내려지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장군님(김정일)의 친필지시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라』는 것이었다. 순간 죽는 줄만 알았던 이들 「죄수」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장군님의 「은덕」을 칭송했고, 군중들도 장군님의 「은혜」에 감동했다.
이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1998년 3월 구호나무와 연관된 사건이 또 벌어졌다. 함경남도 지방에 있는 무재봉에서 대형 산불이 일어났다. 배고픈 주민들이 뙈기밭을 일구다가 실수로 산불을 낸 것이다. 이 산에 구호나무들이 많이 있었고 인근엔 군부대들이 배치돼 있었다. 산불이 워낙 크게 나 바위가 불에 그슬려 탁탁 튈 정도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한다. 구호나무를 구하기 위해 군인들이 동원됐고 20명의 군인들이 구호나무 곁에서 불을 끄다 질식해 쓰러졌다. 그중 17명은 끝내 사망했다.
인민무력부는 이 사실을 즉시 김정일에게 보고했고 김정일은 『참 훌륭한 군인들』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봐 군인들은 이처럼 영웅적인데 얼마 전에 술 처먹고 구호나무를 태워버린 사민(민간인)놈들 있지?』하며 그들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 김정일의 말 한마디에 사람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북한에서 살려준 줄 알고 눈물을 흘린 민간인들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껴버렸다. 며칠 뒤 구호나무를 태워먹은 민간인들은 다시 보위부에 연행돼 종적을 감추었다.
노동신문은 7년이 지난 작년 12월 22일 무재봉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사망한 군인들은 영웅 칭호를 받았고, 살아남은 군인들은 특별히 중국에서 성형수술을 받는 기회를 누렸다.
화재나 재난이 발생하면 인간의 생명부터 먼저 챙기는 민주사회와 달리 수령의 초상화나 고목나무에 목메는 북한주민들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쓸데없이 목숨을 버린 군인들과 인민들의 넋을 멀리서나마 기리고 싶다. 더이상 수령 우상화의 희생물이 되어 귀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없어졌으면 한다. |
상징화: 김일성화 |
2000년 4월 12일부터 17일까지 제 2차 김일성화 전시회가 조선김정일화련맹 주최하에 평양국제문화회관에서 성대히 개최되었다. 또한 평양의 대동강 기슭에 김일성화김정일화전시관이 현대적으로 건설되고 있다고고 월간화보 '조선' 2000년 6월호가 전했다.
이 전시관은 연건평 5000 평방미터로 지하 1층, 지하 2층으로 설계됐다. 지하는 화초재배를 위한 창고와 문화후생시설, 차고로, 1층은 큰 전시홀과 사무실, 2층은 온실로 설계되었다. 꽃의 생육에 필요한 온도와 습도, 빛조절, 환기 등은 컴퓨터에 의해 조정된다고 한다.
김일성화는 난과(蘭科)에 속하는 열대식물로서 김일성 주석을 상징하는 우상화(偶像花)이다. 1965년 4월 김주석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스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았던 것을 10년만에 평양으로 옮겨 김일성화로 명명했다.
이에 대해 평양의 선전매체들은 "1965년 4월 열대의 섬나라인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당시 이 나라 대통령이던 스카르노와 함게 보고르 식물원을 찾으시었다. 그리고 차례로 남방식물원을 하나하나 돌아보시다가 자줏빛의 희귀한 꽃송이 앞에서 걸음을 조용히 멈추시었다...... 스카르노대통령은 그때 이 귀중한 꽃에 세상사람들이 그처럼 흠모하여 마지 않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존함을 올리겠다고 말씀 올리었다. 그것은 주체의 신념이었고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꽃이 북한주민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의 65회 생일 때인 1977년 4월부터이고 지금은 '충성의 꽃', '불멸의 꽃' 등으로도 불린다. 꽃의 색깔은 붉은 자주색이며 김주석을 상징하는 관계로 김주석 찬양내용의 시, 가요 의 소재로 한동안 많이 등장하기도 했다.
'김일성화의 노래', '혁명의 꽃 김일성화' 등이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
상징화: 김정일화 |
◆ 김정일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상징하는 우상화(花). 1988년 2월 김정일의 46회 생일 때부터 소개되기 시작했다. 일명 '불멸의 꽃'으로도 불린다. 북한은 이 꽃이 일본 원예학자인 가모 모도데루가 남미가 원산지인 베고니아 뿌리로 20년간의 연구 끝에 개량, 김정일에게 헌사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북한선전매체들은 가모 모도데루가 "조선인민과 일본인민들 사이의 우호와 연대성, 세계평화위업에 공헌하고 계시는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를 흠모하여 그의 존함과 결부시켜 꽃의 이름을 김정일화로 명명하고 1988년 2월 16일에 즈음하여 그 꽃을 김정일 동지께 바치였다"고 주장한다.
베고니아과의 다년생식물인 김정일화는 크기가 보통 10~20cm이며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잎사귀에서 첫꽃이 핀 다음 차례로 피어 올라가면서 10~15개의 꽃이 4달이상이나 지속적으로 핀다. 꽃은 진한 붉은색이며 한 포기에서 수꽃과 암꽃이 따로 핀다. 키는 30~40cm정도이고, 길고 둥근 잎은 어긋나게 자라며 푸른색을 띤다. 번식력이 강하고 기르기 쉬운 장점을 지니고 있다.
김정일화는 오늘날 북한 전역에 보급되어 있는데 주로 평양의 중앙식물원 등 각지의 식물원내에 설치된 '김정일화온실'에서 재배해 보급하고 있다. 대성산 중앙식물원에 첫 김정일화 온실이 개관된 이후 지금(98.2)까지 각지에 40여 개의 김정일화 온실이 건설됐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989년 12월에 준공된 평남 평성백화원의 김정일화온실로, 총규모 730평방미터이고 4면과 지붕이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1997년부터 김정일 생일행사 일환으로 김정일화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김정일화는 김정일 우상화라는 특성에 맞춰 김정일을 찬양한 내용의 시 대중가요의 소재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대중가요로는 박미성 작곡 우정희 작사의 '김정일화'라는 노래가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이 노래는 "그리워 달려가는 우리의 마음처럼/ 이 강산에 붉게 붉게 피어난 꽃송이/ 아 붉고 붉은 충성의 김정일화/ 송이송이 어려있네 따르는 한마음"(1절)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
혁명사적지: 김정일 혁명사적지 |
사적지 |
위치 |
내용 |
어은혁명사적지 |
평양시 용성구역 |
1962. 8. 20~10. 4 간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학생들과 군사야영을 한 장소 |
덕골혁명사적지 |
자강도 강계시 |
김정일이 6·25 당시 김일성의 말씀을 듣고 장자산에 가는 길에 들러 하루 낮을 보내며 김일성의 안녕을 축원하고 조국의 미래를 꿈꾸었다는 곳 |
장자산혁명사적지 |
자강도 강계시 |
1950년 10월 김정일이 거처·학습했다는 곳 |
장산혁명사적지 |
평양시 서성구역 |
57년 3월 31일 나무를 심고 61년 5∼6월에는 평양시 와산동∼용성 간 도로확장공사에 참여했으며 그해 여름에는 대학생들과 군사훈련을 했다는 곳 |
백두산혁명사적지 |
양강도 일대 |
1956년 6월 김정일이 답사행군대를 처음 조직, 양강도의 혁명전적지에 대한 첫 답사행군의 길에 나섰다는 곳 |
백두산밀영 |
양강도 삼지연군 |
김정일의 출생지로 선전되는 곳 |
천동혁명사적지 |
평양시 순안구역 |
1954년 10월~1959년 2월 불모의 땅으로 버림받던 이 곳을 김정일이 사회주의 문화농촌으로 현명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곳 |
선봉혁명사적지 |
나선시 선봉군 |
김정일이 여러차례 현지지도를 통해 인민의 낙원으로 전변시켰다는 곳 |
이현혁명사적지 |
평양시 사동구역 |
1962년 11월 19일 김일성과 같이 현지지도하며 온정을 베풀었다는 곳 |
경성혁명사적지 |
함북 경성군 |
1947년 6월 28일~9월 26일간 김정숙과 함께 잠시 기거하였다는 곳 |
낙원혁명사적지 |
함남 덕성군 |
1967년 7월 현지지도차 낙원마을을 방문, 제반 건설 방향을 제시했다는 곳 |
성간혁명사적지 |
자강도 성간군 |
1949년 10월 8일~10월 10일간 김일성과 같이 방문했다는 곳 |
용악산혁명사적지 |
평양시 만경대구역 |
김정일이 용악산혁명사적 등산노정을 잡아주고 불멸의 자욱을 남겼다는 곳 |
검덕광산혁명사적지 |
함남 |
1975년 7월 1일 이곳을 현지지도 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는 곳 |
염분혁명사적지 |
함북 |
김정일이 47년 9월 25일 김일성, 김정숙과 함께 돛배를 타고 찾았다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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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전적지: 개요 |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활동을 뒷받침하고, 그의 혁명투쟁 경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우상성역을 말한다. 혁명전적지는 김일성이 항일혁명 활동을 했다는 193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그가 항일혁명 활동을 위해 관련을 맺었다는 백두산 인근지역을 그 무대로 하여 조성되어 있다.
김일성의 혁명전적지는 1960년대 말부터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모두 7개로 추정된다. 보천보혁명전적지(양강도 보천군), 삼지연혁명전적지(양강도 삼지연군), 무산지구혁명전적지(양강도 삼지연군 및 대홍단군), 백두산밀영혁명전적지(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 기슭), 두만강연안혁명전적지(함북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 나선시 선봉군 일대), 동북지구혁명전적지(나선시 선봉군·나진구역, 함북 청진시, 은덕군), 간백산밀영혁명전적지(백두산지구내 간백산) 등이 그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는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활동 시기에 이용했다는 밀영을 새로 조성하는 등 백두산 전체를 김일성의 혁명전적지화하고 있다.
1980년대 말 이후 새로 조성된 밀영으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6년에 조성한 백두산밀영을 비롯해 사자봉밀영, 선오산밀영, 곰산밀영, 압록강연안지구밀영, 간백산밀영, 소연지봉밀영, 무두봉밀영, 대각봉밀영, 쌍두봉밀영, 청봉숙영지 등이 있다.
조선중앙통신(2004.2.18)은 여러 혁명전적지 중 백두산 밀영 고향집의 참관자가 17년간 400여만명이라고 주장했다. |
충성의 편지 이어달리기: |
김일성·김정일 부자 찬양을 위한 대표적인 충성행사의 하나로 정식 명칭은 '충성의 편지전달 이어달리기'이다.
각지의 군중행사에서 채택된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충성의 편지'를 여러지역을 계주형식으로 경유해 많은 주민들이 참여케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김일성·김정일부자에 대한 충성심 고취와 이의 확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행사는 독자적인 행사로서 보다는 통상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생일에 앞서 분위기 조성을 위한 부속행사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필요할 경우에는 김일성·김정일 생일 이외에도 진행된다.
1991년 처음으로 제정된 청년절(8.28)을 맞아 개최된 대대적인 기념행사에서 청년학생들을 대상으로 김정일에게 보내는 충성의 편지전달 이어달리기'를 실시했던 것이 이 경우에 속한다.
행사 참석대상은 청년절 행사때처럼 특정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통상 노력영웅·노력혁신자·모범과학자·문화예술인·체육인·군인·학생 등 각계각층의 주민들이 총망라되고 있다.
충성의 편지 이어달리기는 대개의 경우 주행사보다 1개월여 앞서 시작해 각지 군중집회에서 채택한 충성의 편지를 주행사의 주석단에 바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출발지는 백두산밀영·회령·삼일포·1211고지 등 북한의 외곽지역 20여 곳을 대상으로 한다. |
김일성배지(초상휘장): 개요 |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한 남측 수행원들이 모두 양복 상의 좌측에 2x3cm2크기의 태극기 배지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북한의 당ㆍ정ㆍ군 고위 간부들과 연도에 늘어서서 남측대표단을 환영한 60만 평양시민들은 모두 김일성배지를 부착하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의 초상을 도안한 김일성 배지는 1970년 11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제작 보급하기 시작한 것으로 김일성 개인우상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배지가 처음 제작되었을 때 자신의 가슴에 맨 먼저 달았다고 하는데 이 때 김일성 배지는 오른쪽 가슴이 아니라 왼쪽 가슴의 심장위에 달아야 한다고 지시했다(조선중앙통신, 99.10.27).
북한에서는 통상 고등중학교 학생 이상의 모든 주민들은 김일성배지를 달고 다녀야 한다. 따라서 김일성배지는 당ㆍ정 간부, 군인, 일반주민 등 신분에 따르거나 해외용 및 조총련용 등 용도에 따라 20여 종의 다양한 도안과 규격으로 제작 배포되고 있다.
배지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의 철저한 통제하에 만수대창작사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형상작품을 일컫는 이른바 '1호작품' 전담 미술가들에 의해 제작된다.
신분을 나타내는 배지는 노동당기를 배경으로 김일성 모습을 담은 중앙당 지도원급 이상의 고위간부들이 패용하는 '당기상'(黨旗像), 군복을 입고 있는 김일성을 도안한 국가안전보위부 및 사법 감찰요원용의 '군상'(軍像: 군복입은 모습의 김일성상), 지방의 당지도원급 이상이 패용하는 '원형큰상', 그리고 일반주민들용으로 제작된 '원형작은상' 등이 있다.
용도별 배지로는 해외 무역요원용과 조총련 동포들을 대상으로한 '공화국 기상'(旗像) 등이 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배지가 일부 패용되고 있으며 1997년부터는 김부자가 함께 들어 있는 배지도 패용되고 있다.
새로 제작 배포되어 1993년 7월 1일부터 착용되고 있는 해외 무역요원용 배지는 직경 1.5cm의 크기에 신사복을 입고 있는 김일성 초상이 도안되어 있다. 구형은 직경 2.5cm 크기에 인민복 차림의 김일성이 도안되어 있다).
김일성 배지 착용과 관련해 일부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배지가 상징적으로나마 신분을 나타냄에 따라 일반주민들 사이에서 중앙당 간부들이 착용하는 당기상 배지를 암거래로 불법 구입, 간부 행세를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행태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분의 수직상승이 불가능한 북한체제하에서 신분상승 욕구를 달래보려는 것으로서, 주로 당간부 자식들에 의해 유출되며 교환가치는 배지 1개당 테트론 바지 1벌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400-500원(노동자 월급이 100원 정도)을 호가한다는 증언도 있다. 말하자면 배지는 희소 가치에 따라 정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암거래되고 있는 셈이다. 지방별, 종류별, 발행시기에 따라 상당한 가격차가 난다. 가령 평양은 희소성이 덜한 이유로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김일성 사후에도 배지(초상휘장)의 중요성은 강조되고 있는데 1999년 10월 27일 조선중앙통신은 "주석께서 서거하신 지 5년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조선인민 누구나 다 자기 몸의 한 부분과도 같이 언제나 가슴에 정중히 모시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지난 해 3월 어느 한 혁명사적지에 뜻밖에 산불이 났을 때 구호나무들을 구원하고 희생된 17명의 공화국영웅들과 지난 해 11월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가 풍랑속에서 최후를 마친 15명의 공화국영웅들처럼 자기들은 비록 죽으면서도 주석의 초상휘장만은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게 안전하게 보위한 그러한 실례들은 허다하다"고 밝히고 "이것은 오늘의 김일성주석이신 김정일령도자를 목숨바쳐 옹위하려는 조선인민의 절대불변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설한 바 있다. 여전히 김일성 우상화의 도구로서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7년부터는 김일성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함께 담은 배지도 만들어지고 있다.
참고자료: 내외통신, '북한용어 400선집', 1998 |
금수산기념궁전: 김일성과 공산권 지도자의 사체보존 |
1924년 레닌(공개중) 1949년 불가리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초대 총리(철거) 1953년 스탈린(철거) 1953년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철거) 1969년 베트남의 호치민 대통령(공개중) 1979년 앙골라의 아고스티노 네트 대통령(현상불명) 1985년 가이아나 린든 바남 대통령(현상불명) 1976년 중국 모택동(휴관중) 1994년 북한 김일성(공개중)
레닌의 사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묘에 안치되어 있다. 소련시대 레닌의 사체는 모형인형이 아닐까 하는 억측을 낳기도 했다. 러나 소련공산당이 해체되고 난 1991년 10월 레닌묘의 내부가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되어 '생물구조연구센터'라는 비밀연구기관의 존재가 드러났다. 이로써 레닌의 유체는 실물임이 확인되었다.
생물구조연구센터는 러시아 의학아카데미에 소속된 '全러시아 약용방향식물연구소'(VILAR)의 관할하에 있고 레닌의 유체보존의 모든 책임을 져왔지만 김일성의 영구보존도 이 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평양교외에 있는 금수산기념궁전 3층 중앙홀에 김일성 사체안치실이 있다. 궁전 개관 당시에는 제한된 대표단에게만 공개됐지만 1996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43주년 기념일부터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했고 외국인 관광객의 견학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닌묘와 마찬가지로 입관시에는 카메라나 비디오카메라 등을 소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안치실 내부는 상세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사체에 화장(化粧)과 방부처리를 하여 일정 기간 생전 그대로의 상태로 보존하는 기술을 엠바밍(embalming)'이라고 한다. 엠바밍 기술은 사체를 세정하고 살균소독한 후 혈액을 빼내 착색된 포름 알데히드를 사자의 혈관에 주입한다. 이 방법이 일반적이고 모택동도 사거 직후에 포름 알데히드에 주입되었던 일이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사상 처음으로 성공한 레닌 사체보존방법은 사체의 수분을 단계적으로 특수한 발삼향액과 바꿔넣음에 따라 사체를 말랑말랑한 상태로 보존하고 세균이 사체를 부패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의과대학의 해부학자 블라디미르 비오로비요프 교수와 모스크바 생화학전문가 보리스 즈바르스키 박사였다.
레닌의 영구보존을 성공시킨 공적으로 비오로비요프 교수는 스탈린상을 수상했고 즈바르스키 박사는 레닌 영구보전을 위한 '생물구조연구센터'를 설립했는데 그 존재는 오랜 시간 소련 최고기밀이었다. 1992년 당시 레닌묘의 유지비는 1년에 2500만 달러가 지출되고 있다고 했는데 이 금액은 당시 노동자 5만 명의 급료에 해당된다.
모택동의 경우는 중국 4000년 역사와 근대의학 지식을 토대로 전문가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모택동은 오랜 인습을 타파하기 위해 화장을 장려하고 주은래와 마찬가지로 화장을 유언했다. 1976년 1월 8일 사망한 주은래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고향 산하에 뿌려졌지만 그로부터 9개월 후에 죽은 모택동의 사체 처리문제를 놓고는 당중앙위원회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모택동의 뜻에 반해 영구보존됨과 동시에 사후 1개월후에 그러한 결정이 공표되었다. 그리고 북경시내의 지하에 건설되어 있는 인민해방군 전시최고사령부 '5.19지하단지' 내에서 극비 보존작업을 해서 사체는 다음해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사상 9번째의 영구보존인물이 되었으며 레닌과 같은 방식으로 사체보존을 하였다.
◆ 사체보존작업
사망 직후 처리를 위해서는 약 6~8개월이 소요된다. 4∼5명의 숙련된 전문가가 유체를 발삼향의 액체가 담긴 수조에 넣고, 삼투압을 이용해 그 향액(香液)을 삼투압을 피부에서부터 삼투시키는 작업을 벌인다. 그리고 뇌와 안구, 내장 등을 빼내고 젤 상태의 발삼액을 유체내에 채워넣는다.
◆ 사체공개 준비작업
생체의 수분의 양과 같은 80%의 발삼향액을 유체에 채워넣고, 피부를 말리기 위해 몇시간 동안 공기에 노출시킨다. 그리고 나서 발삼향액이 새워나오지 않도록 노출부분을 없애고 가족 포대를 미라 모양으로 감는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새 옷을 입히면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안치하는' 보존처리가 완성된다.
◆ 사체의 유지관리
주 2회, 관에서 꺼내 방부제를 얼굴과 손의 노출부분에 도포한다. 또 2∼3년에 1회, 발삼향액 수조에 1개월 정도 담둬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지 관리를 위해 북한 전문가가 러시아 '생물구조연구센터'에 연수를 받기 위해 파견된 바 있다고 한다.
◆ 보존비용과 유지관리비
1995년 7월 7일 '모스크바뉴스'는 "러시아인 기술자 7인에 의해서 (김일성의) 사체보존작업이 완료되어 이미 100만 달러가 소요되었지만 이후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보도했다. 또 1996년 7월 북한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여당 골카대표단은 노동당 간부로부터 김일성의 유체관리를 위해 연간 80만 달러가 든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이 숫자에는 금수산기념궁전의 유지관리비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
금수산기념궁전: 프랑스기자의 취재기 |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인 '리베라시옹' 2000년 4월 15일에 실린 로맹 프랑클랭(Romain Franklin)기자의 북한방문 취재기이다. '리베라시옹'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창간한 신문으로 좌파계열의 신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음은 "거대한 거짓의 나라에서 (Au pays du grand mensonge)"라는 제목의 이 기사중에서 금수산기념궁전 취재 부분이다.
◆ 미라가 되어 영생을 누리는 아버지 金
김일성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이곳에서 이것은 하나의 특권이다-은 이후의 것들을 바라보는 척도를 제공한다. 방부처리된 김일성의 시신은 옛 주석궁 안에 안치된 유리관속에 놓여 있다.
이 주석궁은 넓은 연못에 둘러싸인 가운데 전기 울타리가 쳐져 있는 완만한 경사길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주석궁은 매우 인상적인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출입문인 거대한 미닫이문은 굳게 닫혀 있다.
출입이 금지된 중국황제들의 성처럼 이 궁전의 출구들은 거기에 살던 주인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모두 막혀 버렸다. 그리고 그 주인의 거대한 초상화는 궁전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림에는 '태양의 모습'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아버지 김이 - 공식적인 용어에 따르면 -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21세기의 태양'이시다.
대리석으로 된 지하도를 통해 500미터 가량 들어가면 바로 이 '무덤궁'으로 이어진다. 지하도는 자동으로 돌아가는 카페트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정화의식은 가히 사이비 종교의 의식과 견줄 만하다. 우선 여기서부터는 그 어떤 소지품도 용납되지 않는다. 라이터조차도 안 된다.
방문자는 먼저 X-레이탐지기를 지나야 하고 다음에는 몸수색이 이루어진다. 그 다음, 방문자는 신발 바닥의 먼지를 털어 내기 위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카페트에 구두 발을 올려놓도록 요구받는다. 그리고 나면 다시 두 번째의 축축한 카페트가 신발에 붙어있는 박테리아들을 제거한다.
우리는 먼저 엄청나게 넓은 첫째 방에 들어갔다. 그 방에는 김의 동상이 헐리우드식의 조명을 받는 가운데 서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가장 긴 하루'(Jour le plus long)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e)을 짬뽕시킨 '위대한 영도자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마지막 예방조치로 관이 놓여있는 방으로 넘어 가기 전에 방문자는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기계, 곧 순간적으로 공간을 넘나들도록 하는 기계처럼 생긴 강력한 흡입 여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방문자가 옷에 묻혀온 병균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방부 처리된 시신 앞에서 세 번 고개 숙여 절할 때, 수위들은 방문자에게서 털끝만치의 하자라도 발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본다.
다음에는 '통곡의 방'(울음홀)으로 넘어간다. 그 방의 벽에는 '태양'을 애도하는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대부분이 시골서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방문객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가운데 그 어떠한 무질서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한 바퀴를 다 돌 때쯤에 검은 색의 한복을 입은 처녀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과대망상증 환자의 몇몇 유물들을 소개한다.
그의 메르세데스 V-12 자동차, 그의 개인(기차) 차량, 이름이 분명치 않은 이태리의 어느 시장으로부터 받은 명예시민 메달, 외국에서 받은 메달 등등. 김일성은 사후에 '영원한 주석'으로 모셔졌다. 그의 영웅적 행위를 기리는 개선문(파리의 개선문보다 조금 높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불멸성을 선포하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당신이 이 나라 어디를 가든 이 '큰 형님(Big Brother)'의 모습이 당신을 뒤따른다. 그리하여 당신은 모든 건물의 입구에서, 모든 넓은 사거리에서, 모든 사람의 방안에서, 논밭 가운데서, 모든 사람의 외투와 상의에서 그것이 작은 배지의 형태이든, 초상화 형태이든 아니면 색깔로 장식한 거대한 콘크리트 기념비의 형태이든 간에 이 큰 형님을 뵙게 된다.
1천여 점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는 평양 미술관 안에는 몇몇의 풍경화를 빼고는 모두가 김일성이나 그의 가족을 그린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가족들 각각에게는 놀랄만한 혁명적인 과거가 부여되었다(김의 증조부가 1866년에 미국 군함을 물리쳤다는 등).
참고자료: 격월간지 '시대정신', 2000년 5~6월호. |
[김부자 초상화] 액자 안걸면 입주 못해 [2001-12-19] |
◇북한 가정의 집안 벽에 걸려 있는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왼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함께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
북한에서는 일반 가정은 물론 사무실, 회의실, 교실, 영화관, 열차 대기실과 객실, 고깃배의 선실 등 사람이 모여 활동하는 공간이면 어디든 반드시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걸어놓아야 한다.
일반 가정의 경우 이사를 가게 되면 가장 먼저 초상화부터 챙긴다. 초상화는 나무로 만든 액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습기나 외부 충격을 받지 않도록 솜이나 스펀지로 덮고 비닐로 싸는 등 조심조심 다룬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아예 액틀과 유리, 초상화 사진을 분리해 현지에 가서 다시 조립하는 방법을 쓴다.
군부대에서 야외로 작전이나 훈련을 나가도 초상화를 가지고 간다. 야외에서는 대개 야외병실이라 하여 반토굴을 파고 그 안에서 소대단위(25명 안팎)로 생활하는데 이때도 야외병실이 완성되면 초상화부터 건다. 초상화가 걸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신혼부부가 새로 집을 배정 받아 입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주택난이 심각한 북한에서 어렵게 집을 구해도 초상화를 걸지 못하면 살 수가 없다. 초상화 사진은 소속 직장의 당조직에서 내주지만 액틀과 유리는 본인이 마련해야 한다.
액틀은 나무로 만들돼 옹이나 손상이 없어야 하고, 반드시 옻칠을 해 좀이 쓸지 않게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충성을 과시해 문양까지 넣는다.
문제는 유리다. 북한에서는 유리 자체가 매우 귀하고 초상화용 유리는 굴곡과 티가 없는 상품(上品) 유리를 써야 하는데 이런 유리를 구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소한 남포유리공장 제품이 아니면 초상화용 유리로 쓸 수가 없다. 어느 신혼 부부는 집을 받아놓고도 초상화용 유리를 구하지 못해 보름동안 입주를 못하다가 부모님 댁 이불장 유리를 뽑아 해결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액자가 준비되면 해당 당조직에 찾아가 사전에 검열을 받는다. 혹시라도 흠이나 얼룩이 있으면 안 되므로 그걸 사전에 검사하는 것이다. 문제가 없으면 당조직에서 사람이 나와 정식으로 수여식을 갖고 초상화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일장 훈시를 한 다음 사진을 내준다.
초상화는 가정이나 사무실의 출입문 맞은편 벽에 걸게 되어 있다. 물론 조금이라도 한 쪽으로 기울어서는 안 되므로 못을 단단히 친다. 초상화가 걸린 벽면에는 김일성·김정일 사진 이외 일체 다른 것을 함께 부착할 수 없다.
초상화 아래에는 초상화를 관리할 도구를 담아두는 「정성함」이 놓여진다. 보통 정성함 안에는 깨끗하고 흰 천 몇 개와 먼지를 떠는 먼지떨이가 들어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것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해당 당조직에서 시도 때도 없이 초상화 관리상태 검열을 나오는데 이때 초상화는 물론 정성함 속의 천이나 먼지떨이가 지저분했다가는 곤욕을 치르기 때문이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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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유사시 金부자 동상· 초상화 우선 대피 [2005-01-05] |
북한이 지난해 4월 7일자로 전국에 배포한 '전시세칙'은 전쟁 발발 때 북한 주민이 1차적으로 해야 할 대피요령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 부모의 초상화ㆍ동상 보존 등을 규정했다.
전시세칙 제13항은 "모든 부문, 모든 단위들은 자기 단위에 모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김정일 생모) 동지의 초상화, 석고상, 동상, 혁명일가분들의 동상, 백두산 3대장군을 형상한 미술작품들을 갱도 모심실을 비롯하여 안전한 곳에 옮겨 모시고 보위하며..."라고 밝혔다.
이 세칙에 따르면 북한이 전시용으로 각지에 건설한 지하갱도에는 김 위원장과 그 일가족의 초상화 등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방, 즉 '모심실'이 특별히 마련돼 있다.
북한 주민은 전쟁이 발발하면 자기 집과 직장에 걸려 있는 김 주석ㆍ김 국방위원장ㆍ김정숙의 초상화, 주변에 있는 이들의 동상ㆍ석고상, 이들을 형상한 미술작품 및 사진, 김 위원장의 증조부모ㆍ조부모 등 일가족의 동상을 먼저 모심실에 대피시켜야 한다.
이른바 '1호작품'으로 지칭되는 김 주석, 김 위원장, 김정숙을 형상한 미술작품 및 사진작품, 이들의 현지교시판이나 현지말씀판, 당의 기본구호들도 함께 대피시켜야 한다.
북한은 1974년 김 위원장이 김 주석의 후계자로 선출된 직후부터 유사시에 김 위원장의 초상화 등을 먼저 대피하는 원칙과 대책을 마련했으며 주민들을 교육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주민의 활동 및 생활 지침서로 1974년 발표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원칙'(1974) 제3항은 "초상화, 석고상, 동상, 초상휘장, 초상화를 게재한 출판물, 수령을 형상한 미술작품, 현지교시판, 당의 기본구호 등을 정중히 취급하고 철저히 보위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모든 단체ㆍ기관ㆍ기업소ㆍ협동농장 등에 김 위원장의 초상화ㆍ동상ㆍ석고상과 1호작품 등을 관리하는 보관실이 별도로 갖춰져 있으며 주요 기관에는 유사시에 대비한 1차 대피소까지 마련돼 있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작가 출신의 한 탈북자는 "규모가 큰 중앙방송위원회에는 지하에 1차 대피실을 설치해 일단 먼저 대피시킨뒤, 지정된 갱도에 설치된 모심실로 옮겨 보관한다"고 말했다.
특히 화재 등 위급상황 때 목숨을 바쳐 김 위원장 등의 초상화를 먼저 구출해야하며 초상화의 훼손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2003년 8월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한 북측 응원단이 김 위원장의 사진이 있는 환영 플래카드가 빗속에 방치돼 있다며 황급히 철거하는 등 소동을 피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화재 등 위급상황에서 김 위원장 등의 초상화를 옮기다가 목숨을 잃은 주민이 적지 않은데 북한당국은 이들에게 최고훈장인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등 적극 장려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평양 중화군 삼성농장 농업과학기술지식 선전실 화재현장에서 김 위원장 등의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사망한 농장원 최명철에게 '노력영웅'칭호를 수여했다./연합 |
'김일성·김정일 민족' 용어 등장 [2001-09-05] |
'3대헌장 기념탑 준공식서
"모두다 21세기의 위대한 태양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쳐…김일성, 김정일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떨쳐나갑시다."
지난 8월 14일 평양 통일거리 입구에 건립된 "조국통일 3대헌장기념탑" 준공식에서 행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의 준공사 마지막 구절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교의에서 보면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자본가계급의 사상으로서 마땅히 투쟁과 극복의 대상이다. 이런 관점과 입장은 북한에서도 그대로 적용돼 왔다. 그런데 80년대 말∼9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북한의 입장에 커다란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의 실마리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라는 용어를 등장시킨 김정일의 86년 7월 담화에서 맹아를 드러냈고, "우리 민족 제일주의"는 그의 89년 12월 담화에서 "조선민족 제일주의"로 구체화됐다. 김정일이 말하는 우리민족제일주의 또는 조선민족제일주의는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규정됐다. 그는 "민족의 가장 큰 행복은 위대한 수령의 영도를 받는 것"이라고까지 공언했다.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선회는 김일성이 90년 8월 조평통 및 범민련 북측본부 간부들과 가진 담화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이 담화에서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이 있을 수 있으며 민족의 이익이 보장되어야 계급의 이익도 보장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일성민족"이라는 말은 94년 10월 김일성 백일재(百日齋)가 있던 날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간부들과 가진 담화에서 처음 언급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민족의 시조는 단군이지만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며 김일성을 민족의 중시조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99년 평양출판사가 펴낸 "김정일 민족관"이라는 책은 우리 민족을 "만경대의 민족, 백두산의 민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만경대는 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곳이고, 백두산은 김정일의 출생지로 선전되는 곳이다. 김영남 위원장이 말한 김일성·김정일민족은 예의 "만경대의 민족, 백두산의 민족"과도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우리 민족을 김일성 민족 또는 김일성·김정일민족으로까지 정의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김일성이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발전의 새 역사를 개척했고, 지난날 천대받고 수모 받던 우리 민족을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존엄 높고 긍지 높은 민족으로 내세워 주었으며, 이북에 자주·자립·자위의 강력한 나라를 세워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김일성민족의 민족성에서 핵을 이루는 것은 자기 수령에 대한 충효심이며 수령에 대한 충효심은 김일성민족의 훌륭한 민족성의 최고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
동상·초상화: 김일성 동상 |
김일성 주석을 우상화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의 하나. 북한에 김일성 동상이 처음 건립된 것은 1948년 10월 24일. 평남 대동군 간리에 있던 만경대혁명자유가족학원(현 만경대혁명학원)을 평양의 만경대로 이전, 개교하면서 새 학원 청사 준공에 맞춰 동상을 제막했다.
이때 만경대혁명학원에 김일성 동상을 건립하자고 제의한 것은 김일성의 부인(1949.7 사망)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인 김정숙이었다고 북한은 주장하고 있다. 이어 1949년 평양 창전인민학교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모습의 김일성동상이 두 번째로 건립됐다.
이후 김일성동상은 많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세워지다가 1960년대 말 김일성 유일체제가 확립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면서 집중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정일 주도로 북한 각지에 김일성의 혁명전적지·혁명사적지 등이 대거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동상도 이런 성역화작업과 병행해 세워졌다. 현재 전국적으로 김일성 동상은 70여개, 기관·기업소, 학교 등에 있는 석고상까지 합치면 3만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 동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 만수대언덕에 있는 대형 동상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72년 4월 김일성 60회생일을 기념해 건립된 이 동상은 높이가 20m에 이르는 동상과 3m의 받침대로 구성돼 있다. 동상 좌측에는 1930년대 공산주의자, 인민군 119명의 모습을 조각한 '항일혁명투쟁탑'이, 우측에는 대형 깃발과 1950년대 '영웅'·학생 109명의 모습을 형상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탑'이 있다. 김일성 사망 직후 어린 학생들에서부터 현역 군인까지 각계각층 주민들의 대거 몰려와 오열하던 모습이 TV로 방영돼 강한 인상을 남긴 곳이 바로 만수대동상이다.
지금은 국가적 주요 행사가 열리는 무대로 이용되고 있으며, 당·정·군 간부를 비롯한 주민들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들이 평양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가 헌화하고 참배하는 필수코스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김일성동상은 그의 사후에도 건립되고 있다. 1996년 7월에는 중국이 김일성 2주기를 맞아 그의 납상(蠟像)을 보내오자 평북 향산군 묘향산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에 납상관을 새로 개설하고 여기에 납상을 안치한 바 있다. 1997년 11월 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의 본고장인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협동농장과 1998년 9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각각 건립됐다. 특히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건립된 것은 생전의 김일성이 공식 석상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대원수복 차림을 하고 있어 관심을 모았다.
2000년대 들어 김일성 동상은 2002년 4월 평안남도 개천시 혁명사적지와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10월 평안북도 구성시에 각각 세워졌다. 2003년에는 평안남도 안주시 연풍중학교에 동상을 건립했다. 2004년 김일성의 92번째 생일(4.15)을 앞둔 4월 12일에는 평양 만수대창작사에 군마를 타고 한 손으로 쌍안경을 잡고 있는 김일성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대원수 복장을 한 김일성의 동상을 건립한 적은 있지만 기마동상이 세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찬양물이 지속적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주민들의 ‘일심 단결’을 이끌어내 경제적인 어려움과 핵문제 등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나아가 체제의 존립기반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보고있다. 김일성동상이 각지에 산재해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은 현재 국가안전보위부 구내에 유일하게 세워져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양 대성구역 아미산 기슭의 국가안전보위부 청사 뜰에 있다는 이 입상은 1988년 김정일의 46회 생일을 기념해 건립됐으며 '황금전신상'으로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동상이 아니라 금상인 셈이다.
이 밖에 각 지방과 중요 기관에 있는 '김일성동지혁명력사연구실'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석고상(흉상)이 하나씩 있으며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는 대형 석고좌상이 마련돼 있다. 한편 비(非)김정일 가계, 즉 일반 인물의 동상으로는 1960년 중반 양강도 보천군 운흥리에 세워진 박달(朴達)의 것이 최초로 기록되고 있다. 1968년 9월에는 정권수립 20주년을 기념해 항일빨치산 출신들인 김책·안길·강건·유경수·조정철·김경석·최춘국 등의 동상이 각자의 고향 또는 연고지에 세워졌다.
이 밖에 북한 첫 여성영웅 조옥희 , 1930년대 말 이른바 '고난의 행군'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자 '오중흡 7연대쟁취운동'의 주인공인 오중흡, 1211고지의 전쟁영웅 이수복, 일제 때의 소년영웅 김금순, 해방후 애국미헌납운동의 선도자 김제원 등의 동상이 건립됐으며 그 수는 총 140여 개에 이른다는 북한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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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종파사건: 개요 |
1997년 망명한 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황장엽씨는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착하게 된 계기는 '8월 종파사건' 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김강 이필규 서휘 등이 김일성 비판의 선봉에 섰다가 모두 중국으로 망명하거나 제거된 바 있는데, 이들 반대파를 김일성이 '종파', '종파분자', 또는 '종파주의자'라고 규정하면서 맹공하였다. 북한연구자들은 이 시기 권력투쟁을 일컬어 '8월 종파사건'이라 부른다.
김일성 반세기 집권사에서 최대의 위기로 평가되는 '8월 종파사건'은 소련에서 스탈린 사망(1953.3)과 흐루시초프의 등장 및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으로부터 발단된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소련공산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흐루시초프가 전임자인 스탈린을 공격하면서 사회주의권에 일대 파문을 던진 스탈린 비판은 스탈린주의에 충실하였던 북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후 권력기반이 강화되는 추세에 어느 정도 비례해 그 강도를 더해가던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의 경향이 다소 주춤해지고 당을 정점으로 하는 집체적 지도의 의미가 새삼 강조된 것이다. 그 동안 김일성에 국한해 사용하던 '수령'이라는 경칭이 자취를 감추고 대신 당이, 그것도 김일성 자신의 입을 통해 '인민의 정치적 수령'으로 표현된 것은 당시의 이 같은 분위기를 대변한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 동안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당권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소외그룹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에 힘입어 김일성의 리더십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이 김일성을 상대로 내건 대의명분은 개인숭배 타파와, 레닌 이래의 지도원칙인 집체적 지도로의 환원이었다.
김일성파는 처음 당내의 분위기를 의식해 표면상 이들의 주의주장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림으로써 교묘히 예봉을 피해갔다. 개인숭배의 경우 과거 박헌영이 주로 일삼던 것으로 노동당내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었다. 집체적 지도 역시 당창건 이래 한번도 그로부터 일탈해 본 적이 없다는 식이었다.
김일성파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는데 한 마디로 사회주의권 전반의 대세에 비추어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김일성의 리더십과 직접 연계시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제3차 당대회(1956.4)를 통해 당을 확실히 장악한 경험에서 보듯 김일성파의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그 동안 김일성의 독단과 독주에 소외감을 느껴오던 부수상 최창익을 비롯한 연안파 인물들과 부수상 박창옥 등 소련파 일부가 연대하고, 사태의 추이를 보아 조선의용군 출신의 장평산 등 연안파 군부 인물들이 가세한다는 계획 아래 연합전선을 형성해 김일성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나섰다.
마침 5개년계획(1957~1960)을 추진하면서 외부원조가 절실하였던 시점에서 김일성이 1956년 6월 1일부터 7월 19일까지 당·정 핵심간부들을 이끌고 소련 동독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몽고 등 7개 국 방문길에 올랐다.
방문목적은 사회주의 국가들간의 친선과 경제협력이었다. 김일성이 약 50일간의 장기외유에 오르자 이 틈을 이용해 조직적이고 구체적으로 거사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계획단계에서 기밀이 누설되어 김일성파에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결국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비판의 선봉에 섰던 서휘 윤공흠 김강 이필규 등이 중국으로 망명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만다. |
8월종파사건: 역사적 평가 |
8월종파사건은 김일성 권력투쟁사에서 최대 위기로 기록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일인지배체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김일성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내부 결속을 다지고 김일성 일인체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반대파의 입장에서는 상대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합법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리더십의 변화를 모색하였다가 역습을 당하고 숙청되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1958년 3월에 열린 제 1차 당대표자회는 8월 종파사건을 일단락짓고 마무리하는 무대였다. 김일성은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종파여독의 청산과 '당적사상체계'의 확립을 명분으로 한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당대표자회는 김일성이 1950년대 반종파투쟁에서 승리를 선언한 회의로서 김일성 유일체제로 가는 길목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반종파투쟁'은 북한사회에서 김일성 비판세력을 거의 완전하게 일소시키면서 명실상부한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확립시켰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반종파투쟁'은 북한 정치과정에서 당내 활력이 될 수 있는 건전한 의미의 다원적 요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뜻이 된다.
'반종파투쟁'의 귀결은 김일성 지도부의 정치적 승리였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당내 정치과정의 역동성 탈각과 경직화를 낳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8월 종파사건의 결과로 노동당에는 당내 민주주의가 영원히 실종되고 만 것이다.
참고자료: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지도사상과 구조변화를 중심으로-서울, 역사비평사, 1997. 김광인, "북한 권력승계에 관한 연구," 건국대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1998. |
정치범수용소(특별독재대상구역): 개요 |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의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북한주민들은 '통제구역', '특별독재대상구역', '이주구역', '정치범 집단수용소', '유배소', '종파굴' 등으로 부르고 있다. 북한당국은 'OO관리소'라고 부른다. 예컨대 '요덕정치범수용소'는 '제15호관리소'로 불리는데 기록상으로는 조선인민경비대 예하부대처럼 위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른바 반당·반혁명분자 등 체제위해분자 20여만 명을 재판절차없이 집단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래는 이른바 적대계층 가운데 체제위해분자 즉, 숙청된 종파분자, 반당·반혁명분자, 과거의 지주, 친일파, 종교인 및 월남자가족, 북송교포 가운데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자유세계를 동경 찬양자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당의 간부로 있다가 나중에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정치인과 가족이 점차 주류를 이루었으며 특히 김일성우상화 강화과정에서 수용대상이 증가하였다.
정치범수용소는 수용인들의 탈주·소요방지를 위해 철저한 감시·통제체계를 갖춰 운영하는데 외곽 경계선에는 3~4m 높이의 4~6중 철책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탈주가 용이한 곳에는 전기철조망, 지뢰밭, 함정 등을 설치하고 외곽의 울타리를 2㎞간격으로 7미터 높이의 감시망루를 통해 감시하고 있다.
탈주를 기도하다 발각되면 경비원들에 의해 무차별 사살되며 체포될 경우에는 유격대 훈련장에서 살인훈련용으로 제공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전해진다.
일단 수용소에 수감되면 주민으로서의 권리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도 일체 박탈당한 채 생산력을 제공하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다.
입소 즉시 공민증을 박탈당하고 선거권·교육받을 권리 등도 제약받으며 식량·생필품 배급은 물론 결혼·출산 등도 금지시키고 있으며 면회 및 서신연락 금지 등 외부와 연락을 일체 차단 당하고 있다.
수용자 일과는 작업반별 성격 및 계절에 따라 다소 상이하나 농장 작업반의 경우 새벽 5~6시경 기상, 저녁 8시까지 작업을 실시하고 사상교양과 인원점검 후 밤 10시 잠자리에 든다. 탄광 작업반은 동·하절기 구분없이 1일 3교대로 작업하는 등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주식은 강냉이와 감자, 밀, 보리로서 수확기에 각 1회 배급하며 공급량은 종류에 관계없이 1인 1일 기준 탄광은 600g, 지역지구는 500g이나 최근에는 식량사정을 이유로 100~200g 정도 배급된다. 부식은 채소류는 거의 공급이 없고 소금이나 간장·된장 등을 소량 지급, 마늘·고춧가루 등은 텃밭에서 조달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먹을 것의 절대 부족으로 나물·풀뿌리 외에 쇠똥속의 콩이나 개구리알까지도 취식하는 형편이며 판자나 거적으로 만든 집의 나무껍질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수용자 대다수가 영양실조로 펠라그라병, 결핵, 간염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수용소는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자강도 등 모두 지형과 산세가 험악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역별로 보면 함남의 요덕·단천·덕성, 함북의 화성·청진·회령, 평남 개천·북창, 평북 천마, 자강도 동신 등 10개로 파악되고 있다.
수용소는 수용자들의 죄상에 따라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완전통제구역은 북한이 주장하는 이른바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나 해외로 도주하려다 잡힌 정치범들이 종신 수용된다. 혁명화구역은 상대적으로 죄질이 경미한 정치범들이 수용되며 3∼10년이 지나 김부자 체제에 충성할 만큼 사상개조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심사를 거쳐 내보내기도 한다.
수용소의 관리는 이분화되어 총괄조정과 통제는 국가안전보위부 수용소관리국에서 담당하되 경비는 인민보안성 산하 인민경비대에서 맡고 있다. |
정치범수용소(특별독재대상구역): 수용소내 인권유린 |
정치범수용소내 인권탄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항은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점이다. 안명철씨 증언에 의하면, 1986년 10월 함북 온성의 12호관리소에서는 정치범들이 인권탄압에 대한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수용소내 보위원 가족마을을 습격하여 보위원 가족 수백 명을 살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국가안전보위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비대 1개 대대병력을 출동시켜 봉기가담자를 포함하여 청장년 약 5000여 명 이상을 사살하였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고통 등을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다가 체포된 자, 보위부원에게 반항하거나 보위부원을 구타한 자는 반드시 수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하거나 총살한다.
강철환·안혁·안명철의 증언에 의하면, 이같은 처형과 작업중 사고 등으로 인해 사망하는 인원은 1개 소당 매년 수백 명에 달한다. 강철환의 증언에 의하면, 폐쇄된 승호리수용소에서는 1개월에 300여 명 이상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공개처형 대상자가 발생하면 통상 1∼2일 감금해 두었다가 처형 당일 아침 10시경 작업장에 있는 수용자들을 전원 집합시킨 뒤 처형하고 시체는 인근 야산에 매장한다.
안명철은 공개처형이 공포심을 조장하여 수용자들을 순종케 하기 위한 제도였는데, 처형이 너무 잦아 정치범들이 '면역'이 생긴 데다 정치범들의 반발심과 분노를 유발함에 따라 1984년부터는 공개 처형보다는 비밀처형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한편 탈북자 안명철씨는 국가안전보위부 3국 관할의 정치범수용소에서는 비밀처형과 함께 수용소 의사들에 의해 일본의 731부대나 나치 수용소에서 자행되었던 것과 유사한 생체실험이 행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같은 증언은 확인할 길이 없는 상태이다. |
국가안전보위부: 개요 |
국가안전보위부는 반당, 반체제 주민들과 사상이반자들을 색출, 감시하는 사회통제기구로서 인민보안성과 함께 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구는 이외에도 방첩, 간첩색출, 국경경비, 대외정보수집, 종파분자관리를 비롯해 김정일 총비서의 특명에 의해 당간부나 국가기관에 대한 특별사찰도 실시한다.
북한은 국가안전보위부의 창립을 1945년 11월 19일로 본다. 이날 김일성 주석이 당시 남포에 있던 보안간부훈련소를 처음으로 현지지도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사법, 검찰, 인민보안성도 모두 이날을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8·15해방 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하 안전국의 한 개 부서로 창설됐다. 초창기에는 일제의 잔존세력을 숙청하고 혼란된 사회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였다. 1948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후에는 내무성 정보국으로, 6.25전쟁 당시에는 내무성의 한 개 부서로, 1962년부터는 사회안전부의 정치보위국으로 1973년까지 운영되어 왔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지금과 같은 독자적인 정보기관으로 새 출발한 것은 1973년 3월이다.
1967년 당시 내각 부수상을 지내던 박금철, 이효순 등 이른바 '갑산파' 인사들을 숙청한 후 1970년까지 전 주민을 핵심, 동요, 적대의 3개 계층으로 분류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몇가지 원칙'을 전 주민들의 행동지침으로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은 김일성체제에 반대하는 6000여 명의 종파분자와, 적대계층을 처형하였으며, 7만여 명을 정치범수용소에 이주, 특별 관리한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북한은 잔존 적대세력과 불평불만 세력을 체제유지의 위협요소로 보고 전문적 정보사찰기구를 발족시켰다. 이에 따라 김일성 주석은 1973년 2월 15일 사회안전부 산하의 정치보위국을 국가정치보위부로 분리시키라고 지시, 사회안전부의 정치보위국은 1973년 3월 독자적인 국가정치보위부로 승격되었다.
이때부터 사회치안문제는 사회안전부(인민보안성), 반체제 사건은 국가정치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가 전문적으로 담당하도록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
국가안전보위부: 조직과 임무 |
국가안전보위부는 김 위원장이 1974년 4월 성안해 선포한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에 근거해 10가지 범법규정을 자체로 마련, 이에 따라 체제수호 및 김 위원장 보위활동을 펼치고 있다.
조직체계는 중앙에 국가안전보위부, 각 도에는 ㅇㅇ도 안전보위국, 각 시(구역)·군에 ㅇㅇ시(군) 안전보위부가 있다. 이 외에도 철도성 안전보위부, 연합기업소 안전보위부 등 각 기관·기업소에도 보위부 요원을 파견한다. 또, 필요에 따라 항만과 공장에도 보위부 기구를 두어 정보사찰을 실시하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주요 임무는 체제유지를 위한 안전보장이다. 이를 위해 주민들에 대한 정보사찰, 반탐(反探)수사 및 반체제 인물들에 대한 정보수집과 적발 처리, 외국인들에 대한 감시와 해외정보수집 공작을 벌이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 호위협조: 김정일 총비서의 현지 지도에 대비하여 호위사업준비를 한다. 이를 위해 테러위험분자, 철도 도로 건물들의 위험구간과 장소를 사전에 장악하고 경비병력을 배치한다.
현지지도가 예상되는 단위의 노동자, 주민들에 대한 성분, 사상동향을 파악하여 위험인물들을 사전 차단한다.
반당, 반국가음모자 색출 처리와 대간첩 수사: 대표적인 부서인 반탐(反探)부서는 반체제사건 혐의자들을 골라 집중 감시대상자로 등록하고 그들에 대한 탐문과 수사를 진행, 처리를 한다.
남한,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등 해외에 친척들이 있는 연고자들을 빠짐없이 파악, 감시하고 있으며 간첩수사와 탈북자 조사 및 처리도 이들의 주요 주업무의 하나이다.
외국인들에 대한 감시: 북한내에 주재하는 대사관 직원들은 물론 북한에 들어오는 중국, 남한,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국인들이 북한에 체류하는 기간 그들에 대한 감시와 동향감시를 담당한다.
중국의 공안부, 러시아의 안전부와 맺은 협정에 따라 북-중, 북-러 국경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 처리와 국경선의 설정, 주민들의 여행 등 실무적 문제를 처리한다. |
배급제(공급체계): |
북한주민의 식생활은 주·부식에 대한 식량난이 악화됨에 따라 1995년이후에는 배급체제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일반주민들에게 주로 쌀과 잡곡을 평양과 지방, 그리고 신분, 시기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6:4에서 3:7 정도의 배합비율로 배급해 왔으며 배급은 통상 15일마다 실시하고 있으며, 배급절차는 각 직장에서 발급하는 배급카드로 리·동 배급소에서 수령하도록 하고 있다.
출장이나 여행의 경우에도 '량표'라 불리는 양권을 미리 발부받아 매식시 양권과 식대를 함께 지불해야 하는 양표제도를 시행하여 왔으나, 최근에는 식량난으로 인해 양표를 식당에 제시해도 매식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또한 된장, 간장, 식용유, 소금 등 부식의 경우는 인민반을 통해 배급표가 나와 식료품 상점에서 유상공급을 받고 있으나 1995년 이후 배급이 중단되었고 식용유는 김부자생일 때 100g정도 지역에 따라 배급이 되고 있다.
기타 부식의 경우 김치, 콩나물, 두부, 야채 등은 농민시장에서 구입하거나 자체로 만들어 먹는다. 특히 고기류는 국가적 명절에 특별배급을 통하여 할당되는데, 이를테면 김일성부자 생일, 노동당창건일 등에 세대당 돼지고기 등을 수급사정에 따라서 공급품목과 수량을 다소 달리하여 배급하고 있다.
1995-2002년 북한의 식량배급상황
연도 |
국가배급 1) |
결산분배 2) |
1인당 1일 평균배급량 (기준 배급량은 약 600g) |
배급중단시기 |
11월 분배 (1995년 이전 평균분배량 260kg) |
1995 |
연령을 기준으로 3등급으로 감량배급 |
1990년대 초반에는 약 400만톤의 식량재고 보유. 이를 통해 1994년까지 배급 유지 |
약 100kg(250g/일) |
1996 |
4월부터 배급량 대폭감소. 5월경 300g(일부지역 250g) 7~9월 200g, 12월 450g |
배급량 감소에도 불구하고 배급제 지속운영 |
정상적인 곡물분배량의 40%이하로 지급. 3월경에 분배된 식량 고갈 |
1997 |
1/2월 100~200g, 3월 150g 11/12월 400g |
5/6월에 지역적으로 배급중단 시작. 7월말 배급제의 정상적 운영중단 3) |
135kg(일부 150~180kg) |
1998 |
1월 300g, 2월 200g, 3월 100g |
3월부터 8월까지는 배급중단 (*함북은 전면중단) |
146kg(400g/일) 지역에 따라 115kg~195kg까지 편차 |
1999 |
1998.11~ 1999.4 1인당 평균35.5kg (평균 200g/일) 10월 320g, 11~12월 300g |
4월부터 배급중단 |
연간 1인당 평균식량가용량(곡물과 감자) 200kg(500g/일) 일부지역은 260kg |
2000 |
1월 300g, 2월 259g 3/4월 200g, 5/6월 150g 12월 200g |
곡물수요의 1/3정도가 국가배급을 통해 충당. 도시인구는 농촌지역에 비해 1인당 가용식량이 20~25% 적음 |
가을 수확시 1인당 평균 210kg (575g/일) |
2001 |
2000.11~2001.6 1인당 평균 215g/일 (전년동기 200g/일) 7~9월 150g 지급예정 12월 250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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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7월까지 250~350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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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2000년 국가배급을 받은 비농업인구는 약 1500만명 2) 2000년 결산분배를 받은 협동농장원은 약 690만명 3) 1997년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일부지역과 계층이 더 소비하는 식량소비의 양극화 현상 발생 자료: FAO/WFP, "Special Report", 2002
● 급수별 1일 식량공급량
급수 |
1일 식량공급량 |
대상자 |
1급수 |
900g |
해직종 종사자, 중노동자 |
2급수 |
800g |
탄광·광산의 갱내외 운반공, 중장비 운전자 |
3급수 |
700g |
일반노동자 |
4급수 |
600g |
대학생, 연로보장자 중의 공로자, 투병중인 환자 |
5급수 |
500g |
고등중학생 |
6급수 |
400g |
인민학생 |
7급수 |
300g |
연로보장자, 가두여성, 유치원생, 기타 부양자 |
8급수 |
200g |
2~4세 어린이, 죄수 |
9급수 |
100g |
1세 이하의 유아 |
(자료: 통일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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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묵상을 위한 성경적 기초
***기독교인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출 20:3-6]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레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찌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26:27-33]
너희가 이같이 될찌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찐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북한의 상황에 대해
[계 13: 15-18]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한국사회 좌경화 및 영적 위기에 대해
[렘 1:13-16]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하나님이 한반도를 사랑한다는 믿음과 의인들의 할 일에 대해
[욜 2:16-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욜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통일에 대한 회의에 대해
[에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어떻게 통일을 이룰 것인가
[겔 37 1:10]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북한에 접근하는 대원칙
[잠 4: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하나님께서 사명자로서 내게 주신 메시지
[사 62: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
[사 61:1-4]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